제9장  (공수신퇴: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야 하느니라.)


① 持而盈之 不如其已 취而절之 不可長保
②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③ 功遂身退 天之道
{취(헤아리다) : 木+耑(시초 단), 절(동자기둥) : 木+兌(바꿀,기쁠 태)}

<전문 번역>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무엇을) 채워 가는 것은 그것이 (적당한 때) 그침만 같지 않느니라. 헤아리면서 동자기둥이 가는 것(큰 집)도 길게 보전하지 못하니라.

금은보화로 집을 (가득) 채워도 능히 지킬 수 없으며 (물질적인) 부유함과 (높은 지위의) 고귀함은 (그 자체로) 교만함과 같아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기는 법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의 도(뜻)이니라.

{나의 해석서와는 ①의 번역이 다르며 기존서와는 전체적으로 역해가 다른 부분이 많다.}

- 들어가기에 앞서 -
이 문장도 쉬워 보이나 사실 지금껏 틀린 역해가 있는 곳이다. 기존은 '취이절지 불가장보'등 많은 부분을 바로 읽지 못했고 ‘이’는 '부귀이교'와 '공수신퇴'를 자의적으로 번역하여 틀어져 버렸다.

특히 '부귀이교'는 상당한 생각을 요해야 하는데도 다들 넘 쉽게 넘어가 버렸다. 내가 도덕경을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문장이다.

이 장은 전해오는 것에 따라 ‘취이절지’의 문자가 다르다. 사실 문자는 틀리지 않았는데 왕필의 역해를 하는 중에 절(절)을 예()의 ‘誤寫(오사)’로 생각하여 칼날쯤으로 하다보니 후세의 해석가들도 그것에 맞춰 절()을 잘못 필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예 글자를 예()로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해석가가 얼마나 객관적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여겨진다.

《說(설)》
持而盈之 不如其已 취而절之 不可長保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절지 불가장보

(멈추지 않고) 지속해서 (그 무엇을) 채우는 것은 그것이 (적당한 때) 그침만 같지 않느니라. 헤아리면서 동자기둥이 가는 것(큰 집)도 길게 보전하지 못하니라.

(무엇이든지) 채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적당한 때에) 그만둠만 못하느니라. (집이 크다고 하여) 아무리 기둥을 세어도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 내가 읽은 책은 여기의 ‘취이절지’를 아예 ‘취이銳(예)지’로 쓴 해석가도 있다.

‘취이예지’ : 날카롭게 간 칼은(칼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오래 보전하지 못한다.(박일봉,노태준,오강남)
‘취이절지’: 해석에 있어 도올은 여기의 ‘절’을 ‘예’의 오기로 보아 기존의 번역과 똑같이 하였다. 이는 왕필과도 같다.(왕필, 도올, 이경숙)
※ 이 두 가지의 문장은 ‘절’을 ‘예(날카로울 銳)’의 오기로 보아 온 기존번역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도 괜찮아. 다름 줄을 보면 뒤로 넘어가버려. …취를‘갈다’라고해석하면 절은 분명 ‘날카롭게 한다’는 뜻이 될 것이므로, 이것은 예(銳)의 誤寫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다른 노자 주해서를 봐도 대부분 ‘취이절지’를 ‘칼을 갈아서 날을 세운다’는 뜻으로 풀고 있긴 하다.

도올 머리에 유별나게 독창적인 뭐가 나오겠느냐마는…그래 저 문장이 안 읽혀서 멀쩡한 글자를 괜히 바꾸고 자빠지나? ‘취’자가 ‘헤아릴 취’고 ‘잴 취’지 무슨 ‘갈다’라는 말이야? 그리고 ‘절’자를 어쩐다고? 이게 오자니까 ‘날카로울 예’자로 바꿔야 해석이 된다고? 에라이, 밥 팔아 똥사먹을 넘들.(노자를 웃긴 남자.P237~238)

이 문장은 번역에 어려움이 있다. 번역을 생각하지 않고 뜻으로만 본다면 나와 ‘이’의 내용은 같은 뜻이다. 우선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자.

而(이)는 ‘뿐’이라는 뜻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러나’, ‘그리고’처럼 순접이나 역접의 연결사다. 그리고 번역은 앞에서부터 한다. 이것을 기조로 하여 푼다면, ㉠위(上)의 ‘지이영지’는 나의 번역을 보시다시피 문법적으로나 문자로나 번역이 바르다고 보인다. 다만, ‘취이절지’를 앞에서부터 풀면 번역처럼 어색함이 있는데 이는 의미적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나의 풀이다)

㉡다른 가능성을 든다면 의미 없는 연결사(조사)로 보는 경우다. 즉, 지영(), 취절()하면 되는데 뜻 없는 글(이와 지)을 삽입한 경우다. 이 경우가 문법적(동사+목적어)으로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는데 발음 또는 문장의 운율을 위해 2자나 생략 가능한 글을 넣어도 되는지 모르겠다.(사실 이러한 부분들이 나의 번역을 어렵게 만들었다)

㉢而(이)를 ‘~을’ 이라고 푸는 경우다. 이 경우는 반드시 뒤 글자부터 풀어야 하는데 자전에서 而를 찾아보면 ‘~을’이라는 ‘목적격조사’로서의 용례가 보이지 않으며 而(이)를 목적격 조사라 한다면, 없는 경우의 목적어와 일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난 ㉠을 취했고, ‘이’는 ㉡과 ㉢의 방식이라고 보인다.(아무 것도 아니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물음이 자신의 독해력을 키운다.)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持(지속하다:부사어)而(그래서)盈(가득채우다:부사어)之(가다:동사이면서 문장성분상 명사) 不如其已], [취(헤아리다:부사어)而(그래서)절(동자기둥:명사)之(가다:동사이면서 문장성분상 명사) 不可長保]가 된다. 보는 바와 같이 나의 경우는 ㉠을 ‘이’는 ㉡과 ㉢을 선택한 방식이다. 뜻은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어찌 되었든 이 문장은 ‘이’가 기존의 역해를 지적하여 교정하였음으로 번역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취이절지(헤아리면서 동자기둥이 가다)’는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이는 ‘대궐집 기둥들이 보름달에 비추어 지나가는 모습을 그렸다’고 상상해 주었으면 한다. 그처럼 거대한 집이란 뜻이라고 생각하자.

이 두 문장에서 느끼는 것은 물질의 축적이 부질없음을 말하는 것은 같은 데 세밀하게 생각하면 좀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진다. 가득 채우려 해도 자기 그릇만큼 담지 못한다는 것에서는 욕심부지지 말라는 것을, 엄청난 대궐집도 영원할 수 없다는 문장에서는 역시 물질적인 축적이 부질없음을 말하는 것은 같으나 한가지 더 든다면 명예의 덧없음도 말한다고 보인다.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김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공수신퇴 천지도

금은보화가 집에 가득해도 이것을 능히 지킬 수 없느니라. (물질적인) 부유함과 (높은 지위의) 고귀함은 (그 자체로) 교만함과 같아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기나니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의 도(뜻)이니라.

여기의 문장은 ‘이’가 도올을 무척 칭찬한 곳(?)이면서 몇 자 적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다. 그런데 몇 자 되지 않는 이곳에 분명 ‘天之道’라고 하여 노자성인이 엄청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데도 기존은 고작 생각해낸 것이 ‘사람들이 부귀를 뽐낸다면(부귀이교)’ 정도로 풀고 있다.

부귀이교 자유기구(富貴而驕 自遺其咎)를 ‘돈 많고 지위 높다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라고 한 도올의 번역은 대단히 훌륭하다. 칭찬을 해주고 싶다.(노자를 웃긴 남자, P242)

부유하고 고귀함을 자랑하면 스스로 허물이 될 뿐이니(노자를 웃긴 남자)
부유하고 귀하다 하여 자랑하면 스스로 허물이 될 뿐이다.(완역본)

내가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정말 도덕경의 근본 실천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富貴而驕 自遺其咎(부귀이교 자유기구)라는 문장을 읽어보면 노자는 ‘부(富)라는 물질과 귀(貴)라는 높은 지위(또는 選民의식)는 어쩔 수 없이 허물을 남긴다’는 뜻으로 썼다고 보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이’(기존해석)는 ‘부유하고 고귀함을 자랑하면 허물이 될 것이다’는 식의 문자 번역이다. 다른 각도로 말을 해보면 노자는 ‘부귀의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기존의 번역은 ‘(사람들이) 부귀를 뽐내는 위험’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번역이 맞다면 노자성인이 부귀영화를 인정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자성인은 내용에서 끈임 없이 검약과 사랑, 그리고 자연스런 것만을 강조하여 왔다.

지도자 상이 엿보이는 제3장 제10장 제59장을 보아도 속된 표현으로 ‘거지’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또한 마지막장은 구체적으로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제81장 참조) 결론적으로 기존의 번역은 맞지 않다. 富貴를 쌓는 것이 어찌 하늘의 도일 수 있단 말인가? 한번만 쉬어가며 생각해도 알 수 있을 문장이거늘….

또 하나 다른 각도에서 말을 한다면 만약, 기존이 맞다고 가정하면 뒤에 나오는 ‘功遂身退(공수신퇴)’와 문맥이 어울리지 않는다. 몸이 물러나는 것이 ‘천지도’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부귀를 인간이 뽐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는 것은 물러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의 모든 장들에서 지금껏 노자성인의 도덕경 깊이를 그 정도밖에 몰라 도덕경이 세상에 드러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읽을 때 떠오르는 문장이 없는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인용해본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라는 성경구절이다.

왜, 도덕경이 경전인지 감이 잡히는가! 기름기 흐르는 창자로 이웃에 흘러주는 돈을 가난한 인간은 고맙게 느낄지 모르지만 하늘그물은 송송 뚫려있어도 결코 그 돈을 축척한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29만원짜리 인생이여!

‘富貴而驕(부귀이교)’의 而(이)는 정말 귀한 용례다. 기존의 ‘부유하고 고귀함을 자랑하면’이란 번역은 문법을 무시한다고 해도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번역이다. 어조사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而(이)는 여기에서 어조사보다는 동사로 쓰여 ‘~와 같다’로 번역하여 如(여), 若(약)과 동의어다.

나의 번역을 보면 알지만 마치 부귀(富貴)라는 무생물이 무례하고 버릇없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번역되어져 있다. 바로 이런 번역이 바르다. 분명 여기의 문장은 무생물이 주어다. 어떤 경우에 而(이)를 쓰는지 감은 오지만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예문을 많이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조하지만 도덕경은 속된 생각으로 풀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공수신퇴’만 정확히 이해하였다면 ‘부귀이교’를 이렇게 풀 수 없는 문장이다.

※ 而(이)가 ‘같다’로 번역되는 문장이 명심보감(근학편)에 하나 있다.
韓文公曰 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한문공왈 인부통고금 마우이금거) : 한문공이 가로되, "사람이 고금을 통(박식, 꿰뚫지)하지 못하면 말이나 소가 옷을 입은 것과 같(이 뱉어내는 학식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여기의 而(이)는 기존의 역해들도 모두 ‘같다’라는 뜻으로 글자를 번역하고 있다. 문장이 그 뜻으로 번역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功遂身退’는 기존서들이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고 있는데 번역을 잘 못 한다라기 보다는 노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문장번역이다. 크게는 뜻을 맞다고 할 수는 있으나 왜 노자성인이 이러한 문장을 나의 번역처럼 썼느냐 하는 것을 간과했다. 이 문제는 전체적으로 모아 뒤에 다룰 것이다.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니라.(이경숙, 기존방식)

※ 제2장의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라는 문장에서 백서본은 ‘成功(성공)’으로 나와 있다고 했다. 이것을 보면, 그곳은 ‘공성’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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