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단체 회원 등 200여명 모여 원혼 달래

지난 27일 일요일  오전 백아산휴양지에서 통일열사 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에 나섰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옥과 나들목을 지나 1시간 정도 가는동안 오십여년전 남한 특히 전남지역에서 활동했던 빨치산의 투쟁과 역사는 나에겐 생소했다. 그러나 역사속 인물들과 현장을 답사한다는 설레임은  한 구석에 있었다.  

백아산휴양림 행사장에 도착해 처음 만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2003년 전남백운산을 시작으로 올해로 다섯 번째라는것과 언론이라는 많은 창구가 있으면서도 추모제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는 놀라움은 내가 그동안 그늘진 역사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늘 속에 묵묵히 앉아 추모제 시작을 기다리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에서 그 동안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단했던 삶의 모습을, 가족과 함께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어르신들이 모습에 선 걸어온 삶에 대한 밝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 27일 오전 10시 07 통일열사 백아산 추모제 참가자들이 시작에 앞서 기념사진 촬영하고 있다. ⓒ줌뉴스  

휴양지에 도착해서 만난 김영승(통일광장 공동대표)씨는 백아산은 투쟁 당시 격전지였다고 했다.
출발하기 전 알아본 백아산은 해발 810m 밖에 안 되는 작은 산이다. 이 작은 산이 왜 국군과 빨치산의 격전지가 됐을까?

그 답은 김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 선생은 “백아산은 전남 빨치산 유격투쟁에서 서쪽으로는 광주, 북쪽으로는 곡성군, 남으로는 화순을 막아내는 중요한 거점 투쟁의 중심지”였고 “전남도당부와 전남유격대 총사령부, 광주부대, 전남도당 학교와 함께 빨치산 부대의 병기과, 의무과, 보도과, 중환자터가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추모제 시작에 앞서 김영승(통일광장 공동대표)씨가 투쟁 당시의 백아산을 얘기하고 있다. ⓒ줌뉴스  

김씨의 짧은 얘기가 끝나자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한 추모사가 이어졌다. 임방규 통일광장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골짜기를 따라 감싸오는 바람이 먼저 간 동료들과 학살당한 인민들인 것 같다며 백아산 무장투쟁은 민족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헌 양심수 후원회 대표는 “그동안 여러 번 추모제를 가졌지만 오늘 만큼 많이 참석한 적이 없었으며 54년 전 죽고 사는 것을 가늠하는 그 현장에서 피를 토하며 어땠는가 생각 하게 된다”고 말했다.

   
  ▲ 투쟁당시 전남백운산에서 활동 했던 정관호씨를 대표로 분향이 시작 됐다. ⓒ줌뉴스  

백운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검거된 정관호씨는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에 빨치산의 피가 묻어있다”며 추모시 ‘넋걷이’를 통해 당시의 아픔을 토했다.(아래 시)

넋걷이

저기 길 가는 이여
그대 백아산 갈갱이를 아는가

전남 화순군 북면 후미진 골
그다지 높지 않은 평범한 야산이지만
자주 평등을 위한 싸움의 심장부였던
그 불멸의 전적지 백아산

외국 간섭자들 앞에 나라가 위기에 몰리자
너도나도 선봉을 자처하고
인근 산으로 모여 올라가니
그들을 강력한 대오로 엮고 이끈 곳이
노치리 작은 마을 갈갱이였다.

한때는 인근 여러 면을 장악하니
해방구로 찾아드는 인민들 줄을 이었고
골짜기는 출전하는 용사들의 결전가
개선하는 부대의 만세 소리로 우렁찼는데

중무장으로 조여드는 침공대
공중에서 뿌려지는 세균무기 세례
폭격기까지 동원된 초토작전 속에서
용사들은 투석전 육탄전까지 벌이다가
끝내는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저기 낙엽 더미는 뒹구는 시체로
계곡 물은 흐르는 피와 불탄 재로
바위들은 포탄에 박살난 돌가루로
하여 활기찼던 골짜기는 폐허로 변했으니

메아리지던 젊은이들의 함성은
쓸쓸한 솔바람으로 바뀌고
항쟁의 깃발 나부끼던 삼각고지 꼭대기로는
아침 안개 자욱히 머리 풀며 흘러간다

소총으로 제트기를 격추하고
대치전 진지를 지키다가 네이팜탄 공격에
까만 숯덩이로 옥쇄한 고지 전사들
싹쓸이 수색에 무리죽음을 낸 골짜기들

몸서리쳐지는 굶주림과 추위의 이중고
드디어 목숨을 내놓고 마는
길고 길었던 쫓김의 낮과 밤들
그 백아산 기슭에 지금 이렇게 서 있다

이제 우리 저 암벽에다가
꽃다이 젊고 어여쁘던 님 그리는
눈물과 기원의 노래를 새길까
다시는 그 옛날의 참화를 되풀이 말자는
맹세와 위령의 탑을 세울까

그러나 그보다는 먼저
이 산 능선과 골짜기에서 산화한
유명무명 전사들의 원혼을 위해
좋이 차린 넋풀이 굿부터 올렸으면
저 산용이 그러하듯 하얀 너울 펄럭이면서

바람에 실려 들리는 출전가 가락
궂은비에 섞여 들리는 통곡의 아우성
그 웨침이 땅울림으로 번지는 이 곳에서
촛불을 켜고 향 사르며 위령의 제사를 올린다

아, 조국과 아픔을 함께 한 산아
그 묏부리들 푸른 하늘을 이고 섰는데
옷 매무새 단정히 여미며 비노니
이제는 겨레의 앞날을 밝히는
단합과 평화의 등대가 되거라
나라 하나 되는 통일의 이정표가 되거라
영호남 여러 골에서 모여든 신위들이여
어깨동무로 먼 길을 찾아온 영령들이여
저승에서나마 맺힌 한을 푸시고
저희가 무어올린 제단의 높은 자리에서
길이 길이 영광과 평안을 누리소서

무심히 길 가는 이여
그대 백아산 갈갱이를 아는가.

2007년 5월 27일
제5회 합동추모제 이름으로
정관호

   
  ▲ 먼저간 동요들과 학살 당한 인민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한배수씨의 추모굿에서 엄숙함을 느낄 수 있다. ⓒ줌뉴스  

   
  ▲ 추모제가 끝나자 손을 맞잡고 원을 이루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추모제가 끝났다. ⓒ줌뉴스  

추모제가 끝나고 광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오늘 열린 통일열사 추모제에 언론사라고는 편집장님과 내가 속한 줌뉴스 한 곳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여러 행사장에서 보였던 수많은 기자들과 언론인들의 열기가 오늘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전남 화순군 북면에 자리하고 있는 백아산(해발 810m)은 6·25전쟁 이전부터 유격전의 중심지였고 입산투쟁이 재개된 1950년 9월 28일 백운산, 지리산과 함께 전남 빨치산의 본거지 였다.

투쟁 당시 용곡2구 약수마을에는 빨치산의 총수인 박영발 전남도당 위원장이 용곡1구 용촌 마을엔 전남도당부가 있었으며, 수리에는 전남유격대 총사령부가, 원리에는 광주부대와 북면당이, 송단3구 평지마을에는 곡성군당부가, 송단2구 강례마을에는 전남도당학교가 있었고 발동기와 연자방아를 두어 탄약과 식량의 자급조달 했다고 한다.

빨치산들이 ‘흰 갈가마귀 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백아산 하늘바위는 1951년 춘기공세 때 백아산 유격대 위중근 대원이 총탄에 미군 제트 전폭기를 격추시킨 전설을 갖고 있다.

이 날 열린 통일열사 합동추모제는 빨치산 동지들의 추모사를 시작으로 분향, 추모시 낭독, 추모굿 순으로 경건하게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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