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 지도자 연쇄면담, `정치행보 본격화하나'
한 "현실개입 훈수정치"..우리 "원론적 발언"

(서울=연합뉴스) 정윤섭 기자 = 범여권의 통합 작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의 최근 행보가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범여권의 대선주자와 당 지도부를 연쇄 면담하면서 범여권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발언의 수위도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일 손학규(孫鶴圭) 전 경기지사를 시작으로 25일 열린우리당 김혁규(金爀珪) 의원, 26일 정동영(鄭東泳) 전 의장을 차례로 만난 데 이어 28일에는 중도개혁통합신당 김한길 대표, 29일에는 민주당 박상천 대표를 연쇄 면담하고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의 예방도 금주중 받을 예정이다.

김 전 대통령이 연쇄 면담을 통해 내놓고 있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국민은 이번 대선에서 양대 정당간의 '일 대 일' 대결을 원하고 있고 그것이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서는 범여권 진영의 통합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

DJ측은 독일방문 이후 범여권 인사들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호남 민심'의 상징적 존재인 김 전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권에 던지는 무게감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발언 시점도 미묘하다.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대통합 시한'으로 제시한 내달 14일을 목전에 두고 정파간 주도권 다툼만 치열할 뿐 범여권 통합은 교착상태를 면치 못하면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빌어 `범여권 단일정당, 선거연합'을 외치고 있는 것.

특히 `훈수정치를 중단하라'는 한나라당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참에 자신이 나서서 범여권의 단결을 반드시 촉발시키겠다는 '결기'마저 감지되고 있다는 게 정치권 일각의 분석이다.

26일 정 전 의장과의 면담에서는 "물러난 대통령이 나서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생결단(死生決斷)', '시간이 없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간 여러 차례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그로서는 최근 정치 지도자들과의 연쇄 면담과 자신의 '통합' 메시지에 대해 부담스럽다는 점을 감추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말을 뒤집어보면 "현실 정치권이 제대로 못해 내가 굳이 나서게 됐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훈수 정치' 논란이 일고 있다. 한나라당은 김 전 대통령이 현실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할 뿐 아니라 국민의 뜻과 어긋나는 '훈수정치'를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반면, 우리당은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의 뜻을 생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바람직한 정치구도를 주장한 원론적인 수준의 발언이라고 옹호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현안 브리핑에서 "아무리 훈수를 둬봐야 모래알처럼 흩어진 범여권 주자들이 쉽게 뭉치지 못할 것"이라면서 "대권고지를 두고 경쟁하는 정치인들이 원로의 훈수 한마디에 자신의 욕망을 접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정치 9단'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 전 대통령이 정 전 의장과의 면담에서 "한나라당이 혼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고 한 데 대해서도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뒷골목 주먹질에 비유하는 것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우리당 이규의 부대변인은 현안 브리핑에서 "어느 정당이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들 수 있는 지, 국민과 함께 할 미래대안세력이 누구인 지, 국민의 입장에서 제대로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 대 일'의 정치구도가 필요하다는 원로의 원론적 훈수"라면서 "한나라당이 폄훼하는 것은 양당 구도가 되면 한나라당의 구태정치가 국민에게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선거에 불리해 질 것이라는 판단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나 대변인이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뒷골목 주먹질'에 비유한 데 대해서도 "전직 국가최고책임자이셨던 원로 정치인에 대한 예의도 없는, 한마디로 '버르장머리 없는 발언이자 태도'"라고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이처럼 정치권의 '훈수정치 공방'이 일고 있는 것을 의식한 듯 김 전 대통령은 금주중 범여권 인사 연쇄면담을 끝낸 뒤 내달부터는 6.15 남북정상회담 7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착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범여권 통합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는 한, 앞으로도 김 전 대통령을 찾는 범여권 정치인들의 발길은 더욱 잦아질 수 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 조언을 둘러싼 '전직 대통령의 훈수정치' 파장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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