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전문 번역)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라. 물의 선은 만물을 이롭게만 할 뿐 (만물과) 다투지 않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도다. (물의 삶과 같이 너희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세상을 나아감에) 좋은 땅에 머물라. (세상 보기를) 고요한 심연에 마음을 두라.

(사람을 만남에 있어) 최고의 어짊으로 대하라. (더불어 이야기 할 때는) 진실한 믿음으로 말하라. (나라나 이웃 또는 가정을 다스림에) 최고의 다스림을 바름으로 하라. (일을 해 나갈 때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을 삼으라. (머문 곳을 떠날 때는) 최적의 때에 움직이라. (이처럼) 대저 오로지 다투지 말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허물이 없을 것이다.

{기존 번역과 차이가 없으며 기존의 해석서와는 일정부분 차이를 보인다.}

노자의 글은 거의 대부분 문장자체만으로는 정치나 처세의 2분법을 적용하기 어렵다. 거의 동시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장도 마치 처세로 보이나 ‘정선치’가 들어가 딱히 처세로만 고집 피울 것은 없다.

내용상 이 장은 그리 토를 달만한 곳이 없는 곳이다. 즉, 머리를 써서 판단을 해야할 만큼 난해한 뜻이 문장의 이면에 들어있지 않고 바로 문장의 번역에 들어난다. 따라서 기존의 역해도 거의 바르다고 본다. 물론 居善地부터 動善時까지의 번역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그 뜻이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기존의 역해도 무난한 곳이다.

《說(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악 고기어도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의 선은 만물을 이롭게만 할 뿐 (만물과) 다투지 않고 (또한 물의 선은)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상선약수’ ‘상선약수’, 흔하게 들어보는 4자성어 중에 하나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 제8장 첫 문구다. 上中의 上인 善이 ‘물과 같다’고 노자는 말한다. 왜 최고로 보는가? 여기서는 3가지가 언급되어져 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한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 셋째,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지금의 오폐수도 사실 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물 속에 들어있는 오염원인 중금속들이다. 물 자체로는 역시 노자의 생각대로 이로움만 있어 보인다. 가끔 홍수를 동반하는 것은 노자의 생각에는 반자연적이다.(제23장) 고로 이것으로 물을 따져서는 안 된다. 자연스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여 거의 도와 같다고 하였음으로 이후 예문들에서 도를 이야기 할 때면 물에 대한 예문들이 많이 나올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겠으나 사실 도덕경 81장중 세네 곳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기로는 물의 특징을 이야기한 이후 더 이상 이것을 가지고 풀만한 말(설명)거리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대용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박(樸)이다. 사실 끝까지 보면 제3장까지 한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마지막에 노자의 이상향이 나오지만 암튼 동의반복(同意反復)이다.

이 문장은 뜻에 있어서 문제될 곳이 없음에도 ‘이’만 유일하게 우리말의 어순을 따라 번역과 해석을 함으로서 아마 내가 아는 한 도덕경 해석서중 유일하게 바르지 않아 보인다.

‘處衆人之所惡’,󰡐뭇 사람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노자를 웃긴 남자),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도덕경 완역본, 이경숙)

여기서의 문제는󰡐전체의 동사가 무엇이냐󰡑인 것이다. 본 바와 같이 ‘이’는 ‘惡’를, 기존 역은 ‘處‘를 전체의 동사 즉, 道의 동사로 봤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해설에 보인다.

이 장은 앞장에서 말한 ‘외기신外其身’에 대한 부연이다. …이 장에 대한 기존의 번역들은 하나같이 ‘물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는 식이다. 만약에 노자가 이런 뜻으로 쓴 것이라면 이 문장은 ‘처 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가 아니라‘처중인지오소處衆人之惡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도 역시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말 중에 하나가 됐을 것이다.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곳, 낮은 곳, 번잡스러운 곳에 있으려고 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이경숙, 완역 도덕경 p129~130)

‘이’는 기존처럼 번역이 되려면 '所惡'가 아니라 '惡所'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所(소)는 자신을 꾸미는 관형사를 뒤에서 받는다. 따라서 그의 설명처럼 ‘오소’로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본인의 해설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수긍하기 싫어하는 것(사람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곳, 낮은 곳, 번잡스러운 곳에 있으려 한다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처세의 근본이며 ‘만물작(제2장)’하여도 관심 없는 어머님의 삶이라는 사실이다. ‘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이’가 넘지 못한 도덕경의 한계다.

處(처)가 술어일까, 惡(악)이 술어일까?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의 주어는 水(수)다. 당근 물(상선)은 앞 문장에 나와 뒤에서는 생략했을 뿐이다. 한번 털고 써 보면 水利萬物 水處人之所惡로 할 수 있다. 물(주어) 다음에 놓이는 것은 앞문장의 동사가 利인 것을 감안할 때 여기서는 處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한문의 문장 구성[水주어處동사(衆人주어之조사所惡동사)보어]으로 보아도 惡(오)보다는 더 어울린다. 말했지만 ‘주어’다음에 나올 품사는 ‘동사’여야지 ‘목적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번역처럼 ‘뭇 사람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것’은 오직 ‘外其身而身存’에만 이어지지만(그래서 님은 그것하고만 연관지어 물은 마을과 멀리 있다 했다) ‘뭇사람이 (머물기를)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고 했을 때는 사정이 상당히 달라져 앞 장(제7장)의 ‘外其身’뿐만 아니라 ‘後其身’과도 연관되어진다. 따라서 기존처럼 處를 동사로 해서 역을 하여야 󰡐後其身 而身先󰡑하고 󰡐外其身 而身存󰡑이 동시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故無尤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고무우

(물의 삶과 같이 너희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세상을 나아감에) 좋은 땅에 머물라. (세상 보기를) 고요한 심연에 마음을 두라. (사람을 만남에 있어) 최고의 어짊으로 대하라. (더불어 이야기 할 때는) 진실한 믿음으로 말하라.

(나라나 이웃 또는 가정을 다스림에) 최고의 다스림을 바름으로 하라. (일을 해 나갈 때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을 삼으라. (머문 곳을 떠날 때는) 최적의 때에 움직이라. (이처럼) 대저 오로지 다투지 말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허물이 없을 것이다.

앞글에서 물의 처세를 이야기하였다. 노자는 물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연히 우리들에게 당부의 말이 이어지리라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인을 사용하여 말하지 않았다.

성인을 빗대지 않고 직접 노자가 강조한 문장이자 구체적인 실천강령이기도 하다. 이런 문장은 도덕경에서 극히 드무니 깊이 새겨 살아갔으면 한다. 사실 나도 그렇게는 살지 못하고 있지만….

노자는 우리들에게 총7가지의 삶의 처세를 요구하고 있다. 그냥 열거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읽어보면 인간이 터를 잡고 이웃과 살아가다 옮기는 것까지 생활(삶)속의 모습들을 열거해놓았다. 그래서 인생 삶이 스크린처럼 그려진다. 정말로 그런 생각을 노자가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곳에서, 깊은 마음가짐으로, 대할 때는 어짊으로, 믿음을 주는(또는 믿음의) 말로, 다스림을 바르게 하고, 능히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며, 때를 가려서 움직인다. 이처럼 조심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뒤에 나온다. 대저 싸우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게 바로 물 같은 삶이 아닐까?

해설은 이것으로 끝내고, ‘이’가 풀이한 부분에서 나와 다른 것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는 이 문장을 상선(약수)의 다음단계(中善이나 下善)로 풀어, 생략어를 나와 다른 ‘이와 같은 상선이 어렵다면’을 넣었다. 분명 물의 선이 3가지인 점과 비교하면 종류가 많아 그렇게도 생각되어지지만, 내가 생각기에 노자성인이 살면서 보니까, 道와 가장 가까운 것이 현상에서 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人間事도 이와 같이 살아라 하는 뜻이 다음에 이어지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생략 글로 ‘그렇게 때문에 너희들도 물처럼 세상살이에 있어서’를 넣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그렇게만 산다면 바로 물의 삶과 동일한 것이다라고 보기 때문이며 바로 인간이 형구(形軀)를 가졌기 때문에 물처럼 3~4가지로 이야기되어지지 않고 더 요구사항이 붙었다고 본다.

다만, 이 8가지 중(不爭을 넣어서) 물의 특징 중 하나인 水善利萬物의 利가 없는 이유는 상대적인 인간에게서 배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노자성인은 보는 것 같다.(제77장의 人之道 則不然 損不足 以奉有餘 孰能有餘 以奉天下 唯有道者, 제81장의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참조).

아무튼 노자는 물을 비유로 인간이 목숨을 온전히 하다가 때가 되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이와 같이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도덕경 81장중 상중하로 표현한 문장을 보면 노자는 반드시 단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제17장 등 참조). 전체적인 뜻은 上善이든 中善이든 下善이든 변함이 없다고 보여지며 인생사에 있어서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어디 원한이 있으리요.

그럼 이 七善은 결국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말인가? 바로 뒤에 나오는 선언적인 문장인 ‘부유부쟁’ 즉, ‘다투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 앞세우는 말이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싸우지 말라고 했을까? 싸움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니 당연히 흔적(허물)을 남기기 때문이다. 바로 요 말을 하기 위해 七善을 열거한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시는지….

이상은 초본의 내용이다. 완역본에서는 이 해석을 바꾸었는데, ‘여선인’과 ‘정선치’에 나오는 ‘仁(인)’과 ‘治(치)’가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인용생략)
그 부분에 대한 나의 말만 간추려 올린다.

도덕경이 왜 정확히 이해되지 못했을까? 81장까지 다 읽은 난 이런 생각을 했었다. 후에 정리를 하겠지만 우선 간단히 언급하자면 도덕경이 정치를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백성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지도자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며 깝죽거리는 족속에게 경계의 말을 한 것이다.

내용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無정부적(무위자연이 정치術임으로)이라는 것에 있고 나라의 규모가 아주 작다는 것에 있지 정치는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는 지도자 상을 열거한 곳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힘만 세다고 무조건 백성 짓밟고 왕 헤퍼먹으려는 놈들을 경계했지 정치를 부정한 것이 아냐? (이 도덕경은 정치를 深度있게 논하고 있지만 문제는 내가 생각기로 정치지도자의 자질을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높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의 仁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仁이 들어간 문장이 與善仁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온전한 인으로 함께 하라’가 돼, 이제 여기에서 노자가 인을 어떻게 풀었는지만 생각해 보면 된다. 이것의 힌트가 되는 것이 제38장이다.

여기서 노자는 인을 ‘爲之而無以爲{(자신은, 내적으로는) 꾸밀 뿐 (타인에게, 외적으로는) 꾸밈으로써는 없다 : 노자가 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다고 생각한다.}’라 했어. 그리고 덕의 다음 단계로 놓았어. 물론 上德은 ‘無爲而無以爲{(자신에게) 꾸밈이 없어서 (타인에게) 꾸밈으로써도 없다}다. 보면 요 仁은 앞만 다르지 뒤는 德과 같다. 즉,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는 꾸밈이 없다는 것이 요 ‘仁’이다. 만일 자신까지 꾸밈이 없다면 이미 德者의 반열에 들어버린 것이다.

암튼 인간이 사회의 삶 속에서 갈 수 있는 최고의 단계가 요놈의 仁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이 가능한가?는 나도 물음표다. 아마 마음과 표현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찌돼든 ‘여선인’은 ‘타인과 함께 할 때는 꾸밈이 없이 하라’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善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내각 생각기로 인간이 인간끼리 살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이라고 보여진다. 德은 내가 보기에 聖人의 반열이다. 제59장의 ‘중적덕’이 그것이다. 보았듯이 노자는 인간 모두에게 성인이 되라고 요구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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