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박물관대학 과정 일환으로 해외문화유산 탐방을 실시하고 있다. 올해는 '동서 문명의 보고'를 주제로 내건 터키 지역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지난 12일부터 21일까지 9박10일 일정으로 실시된 이 탐방에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과 박물관대학 수강생 등을 비롯한 58명이 참가했다. 연합뉴스는 이에 동행해 탐방한 성과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어허, 신안선 유물이 여기에도 있네."
1962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입학 이후 지금까지 45년을 발굴현장에서 보낸 고고학자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이 이스탄불 톱카프 궁정(Topkapi Palace) 중에서도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첫 번째 구역인 도자실에 들어서자마자 던진 첫마디다.

"이것 보라구. 이건 완전히 신안선 청자와 똑같잖아?"
그가 가리킨 전시품은 국내에서는 흔히 청자대반(靑瓷大盤)이라 일컫는 대야 혹은 대형 접시의 일종이었다. 그러고 보니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에 상설 전시 중인 청자대반과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크기나 모양새가 틀림없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만큼 닮아있다.

이곳이 머나먼 터키 땅이라는 사실만 기억에서 지워 버린다면 신안선 유물이라고 착각할 만한 청자류는 대반 외에도 제법 눈에 들어온다.

이곳 도자실은 마치 뒷간을 연상케 하는 노후화한 건물 겉모양새와는 달리 내부는 최고급 도자기가 발하는 빛으로 휘황찬란하다. 이곳은 톱카프 궁정이 왕성(王城)으로 기능하던 오스만 터키 제국 시대에는 술탄과 왕비를 필두로 상주 인구 5천 명을 먹여 살리는 요리실이었다. 그 희미한 흔적은 지붕 위로 두 줄로 우뚝 솟은 대형 굴뚝과 어쩐지 음식 냄새를 풍길 것만 같은 내부 구조에서 발견된다.

   
 
완상용 외의 주된 기능이 그릇인 데서 착안해 부엌을 도자실로 개조했을까? 이곳 전시실 정문 왼쪽에는 기자는 이해할 수 없는 터키어 표제 아래 그 영문 번역어임이 분명한 '왕실 부엌 / 중국과 일본 도자 전시실'(Imperial Kitchens / Chinese and Japanese Porcelains Exhibit)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이제는 세계 최대 중국 도자 소장처 중 한 곳으로 당당히 지목되는 톱카프 궁정의 도자실은 송ㆍ원대(宋元代) 중국 청자를 필두로 명ㆍ청대(明淸代) 청화백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제작 연대순을 따라 진열장 안에 1줄로 배열하고는 밀려드는 관람객을 맞아들인다.

관람선을 따라 죽 돌던 조 관장은 "어디서 이렇게 많은 중국 도자기를 긁어 모았지?"라고 거듭 되뇌인다.
청화백자 중에는 바닥이 위로 보이게끔 뒤집어 놓은 유물이 더러 발견되고 그 중에는 바닥에 제작 연대를 표시한 명문(銘文)도 서너 점이나 된다.

한데 그런 명문은 예외없이 '대명가정연제'(大明嘉靖年製)라고 되어있다. 명나라 때 가정(嘉靖) 연간에 제작했다는 뜻이다. 가정은 명나라 황제 세종(世宗)이 재위 45년간(1522-1566) 줄곧 사용한 연호. 제작지와 제작연대를 분명히 한 것이니,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원산지 표시 시스템이랄까, 바코드라 할 만하다.

관람선을 따라가던 조 관장이 갑자기 그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국 도자기가 이슬람 '모자'를 썼네. 어허 이건 모자 뿐만 아니라 금목걸이를 했군. 중국과 이슬람을 섞어놓았군."

   
 
주전자형 청화백자 혹은 백자 유물 중 일부에 이슬람 스타일의 금동제(혹은 금제) 뚜껑이나 목테를 두른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조 관장을 따라가던 최형균 토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거든다.
"아무래도 (이들 중국 도자기는) 주문생산품인 듯합니다. 중국쪽에서는 수출용으로 제작했겠지요."
의문은 중국제인 저들 도자기에 이슬람식 장식물은 부친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데로 옮겨진다. 해외판로를 염두에 두고 애초에 중국에서 제작할 당시에 이미 저런 장식물을 달았을까? 아니면, 이를 수입한 이슬람 사람들이 자기네 구미에 맞게 장식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 분야 전문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톱카프 궁정 관련 각종 현지 홍보책자에는 이곳의 중국 및 일본 도자기 소장품을 1만2천 점이라고 소개한다. 명품 위주로 상설전시를 하기 마련인 박물관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곳 또한 상설전시품은 그 중에서도 명품만을 엄선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곳 소장품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 왕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입수한 물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른바 질이 떨어지는 도자기는 다른 유사한 박물관보다 적을 것임이 틀림 없다. 빡빡한 일정에 밀려 박물관 현지 관계자들을 만나 이런 궁금증들을 해결하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하다.

이곳 도자실은 분명 '중국과 일본 도자 전시실'을 표방했으나 막상 확실한 일본 도자 상설전시품은 그 마지막 코너를 장식한 3점에 지나지 않았다. '이마리 디시'(Imari Dish)라는 명패를 내건 18세기 전반의 대형접시, '아리타 디시'(Arita Dish)라는 19세기 접시, 그리고 18세기 제작품인 면도용 접시가 그것이다.

   
 
에도(江戶)시대 일본 도자기는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들었을까? 중국이란 통로를 거쳤을까? 학계에서는 나가사키에서 일본을 접촉한 네덜란드 상선을 통해 나간 물품으로 간주한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도공들을 대거 포로로 데려간 일본은 17세기 이후 도자 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나아가 이를 발판으로 동시대 조선이 쇄국으로 일관할 즈음에 이미 세계 시장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것이 톱카프 박물관에 조선 도자기는 단 1점도 만날 수 없는 반면, 비록 수량은 적으나마 일본 도자기가 상설 전시되는 까닭일 터이다. 한국 관광객 만큼이나 많은 일본 관람객들이 이역만리에서 만난 '자국산' 도자기 앞에서 연신 탄성을 질러대는 기회가 우리 일행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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