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전문 번역]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 곳(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현빈이라.
현빈의 문(신이 죽지 않고 영생하는 곳의 문), 이곳은 천지의 뿌리(현상계가 시작된 곳)니라.
영원토록 이어져와 있는 것은 같은데 ( 그래서 있다면 쓰이려 발악을 할 것인데 그 무엇은) 쓰임(에)은 힘쓰지 않는구나.

[해설을 보강했으며 기존과는 역해가 다르다]

불교의 열반은 인연을 끊고 윤회를 끊어 영원히 도에 합일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인생이 고해임으로) 노자성인이 표현한 여기서의 말을 빌린다면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아닐까 보여진다. 형이상학이며 正覺자의 설명임으로 그 곳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신이 죽지 않는 그곳을 노자는 ‘현빈’이라는 문자를 사용하여 다음이야기를 풀기 위해 규정하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이 ‘현빈’도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처럼 한번정도는 ‘가물가물한 깊은 골짜기’정도로 풀이해볼 필요는 있으나, 그 정도의 의미를 머리에 입력하였다면 이제는 그냥 의미태의 고유명사로 그대로 ‘현빈’하는 것이 낫다.

[說(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바로 현빈이라 이른다.
(그) 현빈의 문이 바로 천지(우주만물)가 시작된 곳이라 이른다.

이 문장은 기존 번역들이 엄청 이상하게 생각하여 방향을 틀려 잡은 곳이다. 반복할 필요 없이 왕필의 해석을 따랐기 때문이다.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도올 및 기존의 방식)

‘현빈’을 보는 바와 같이 ‘암컷의 가물한 곳’으로 보아 기존해석은 여성의 성(性)을 지칭하는 말로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신이 죽지 않는 곳’으로 풀이해야지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보아서 여성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병자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의문점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노자도 어머니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1장에서처럼 ‘萬物之母’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미가 생명을 배출한다는 것에는 노자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천지 만물의 어미, 즉 ‘천지가 시작되는 곳’이 어디냐는 것인데 그것을 여자의 성으로 보는 것은 아무리 좋은 비유로 보아도 기가 찬 발상일 뿐이다. 좋게 말해 ‘인간이 시작된(만들어진) 곳이 어딜까?’했다면 그래도 모르지만….

이런 설명 외에 기존의 번역이 잘못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앞뒤 두 문장은 동일하게 ‘~시위~’로 연결되어있다. 그런데 뒤의 문장, ‘현빈지문 시위천지근’은 기존이나 나의 번역을 보면 모두 ‘현빈의 문, 이것(이)을~’이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앞 문장의 ‘곡신불사’를 ‘주어+술어’를 갖춘 문장으로 정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이라는 문장은 ‘곡신불사’를 한 문장으로 풀어 뒤의 ‘현빈지문’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곡신불사’를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로 풀 경우 말이 되지 않는다. 문장을 보면 ‘곡신불사’=‘현빈(지문)’=‘천지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데, 이를 기존의 번역으로 만들어 보면, ‘계곡의 하나님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천지의 뿌리’라는 결론이 되어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谷(곡)=천지의 뿌리’는 말이 성립된다.

綿綿若存 用之不勤(면면약존 용지불근)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와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있다면 인간처럼 쓰이려 발악을 할 것인데 그 무엇은) 쓰임(에)은 힘쓰지 않는구나.

※ 이 문장은 기존과 ‘이’와 나의 역해가 차이를 보이는 곳이다. 綿綿若存부터 보자.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노자를 웃긴 남자,)
면면(綿綿)히 있는 듯 한데, (이를 활용해도 지치지 않는다.)(노태준님,노자도덕경,P42)

면면약존(綿綿若存)-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언제까지나 연속하여 존재한다는 것, 존재하는 듯하다는 것은 존재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피한 것인데(노태준님, p43)

도올 왈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도다.’ 앞에서 ‘이용지 혹불영’을 ‘아무리 퍼내어 써도 마르지 않네’라 했던 것과 똑같은 지랄 육갑이 또 나오지. ‘면면’은 노자가 처음 쓴 이래 지금도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말이다.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과 같이다.… 이 면이 두 개가 중첩되면 ‘이어지고 이어진다’ ‘끊임없이 연결된다’는 의미다.… 이 ‘약’을 도올은 ‘같을 약’으로 읽어서 ‘약존(若存)’을 ‘있는 것 같네’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것도 한문 번역을 제대로 못하는 초딩 같은 짓이다.

이 문장에서의 ‘약’은 앞뒤 구절의 문맥상 의미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어조사로 기능하고 있다. …블근은 말 그대로 ‘부지런하지 않음’이다. 달리 말하면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불근’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쓰임에는 게으르다’는 뜻이다.…즉, '현빈'이라는 것은 ‘천지의 근원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지만 쓰임(用)에는 게으른 것’이라고 노자는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때문에 ‘약’은 ‘~이지만’ 또는 ‘~일 뿐’이라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영원토록 이어져올 뿐 쓰임은 없느니라’가 된다.(노자를 웃긴 남자,P176-177)

이 문장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두 가능해 보인다. 다만 ‘이’의 뜻보다는 노태준이 생각하는 각도가 더 맞아 보인다.

우선 면면(綿綿)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이’는 ‘이 면이 두 개가 중첩되면 “이어지고 이어진다” “끊임없이 연결된다”’로 보아 예를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을 들었다.

이 설명이 틀리는 것은 아니나 의미상 다른 뜻이 조금 더 첨부되어져야할 것 같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끊어질 듯 끊어질 듯’이라는 수식어다. 무슨 말이냐면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이란 ‘오랜 옛날부터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전통’이라고 푸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綿綿이라는 문자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져 있다. 물론 이어져 왔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다음은 若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若은 ‘같다’가 맞다. 어조사로 푸는 것은 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若(같다)의 의미는 ‘같을 同’하고는 다르다. 나는 어원은 몰라 이론적인 설명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여러 예문을 들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먼저 同의 사용을 보면 同門, 同志, 同窓生 등이 있다. 同門을 豫로 하여 특징을 설명하면 ‘같은 문’ 또는 ‘문이 같다’인데 사람이 다르고 졸업회가 달라도 ‘같은 문’을 나온 것으로 ‘같다’라는 것이다. 즉, 각기 다른 그들은 ‘같은 문으로서 같다’가 된다. 즉, 같은 문을 나왔다는 뜻을 말한다.

우리가 제1장의 同의 쓰임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양자동’은 이 둘은 같다.(똑같은 것이다.) ‘동위지현’은 ‘이것을 함께 말하면 가물다.’ 즉, 가문 것으로는 똑 같다는 말이다.

그럼 若은 어떤가? '철이는 힘이 쎈 것 같다‘처럼 ’추측‘을 나타낼 때 쓰인다고 보인다. 예를 들어 득지약경(제13장)처럼 ‘이것을 얻음에 놀라워하는 것 같다’에서 보듯 추측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얻음)이 곧 그것(놀람)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즉, 어떤 기준으로서 같은 것은 없다. 또 하나 더 들면 中士聞道 若存若亡[중간쯤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 도라는 것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이 헷갈려 한다.(제41장)]이 있다. 아무튼 여기서는 추측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의 해설은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해설은 그 후에 출간된 완역본에서는 나와 같이 수정하였다. 若(약)과 綿綿(면면)을 설명하고자 비교문으로 실은 것이다.

다음은 ‘用之不勤’을 보자.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도올)
이를 활용해도 지치지 않는다.(노태준님)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노자를 웃긴 남자, 이경숙님)

이 문장의 해석은 기존 것은 거의 없던가 내용이 빈약하다. 예를 하나 든다면
이것을 활용하면 언제까지나 그 활동이 계속되고, 또한 도 그 자신도 결코 피로하지 않다.(노태준 해의,P43)

보다시피 이 장 전체는 면면약존인 ‘그 무엇’을 설명하는 곳인데 도올이나 노태준처럼 기존은 ‘사람이 그 무엇을 활용한다’는 뜻으로 변질되어져 설명되고 있다. 이는 ‘이’ 이전에 정확히 이 장을 소화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의 글은 주체가 ‘도’라는 것, 즉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 것’의 주체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기존의 번역이 더 낳았지만 해석은 기존이나 완역본이나 동일하다. 이는 ‘용지불근’의 번역 때문인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이어짐이 실낱같아서 어찌 보면 있는 것도 같지마는 쓰임새는 없다.(이경숙 완역본, P117)
‘면면약존綿綿若存’을 보통 ‘이어지고 이어지니 있는 것 같다’고 옮기는데, 이런 번역은 원문의 가치를 반감시키는 악역惡譯이다. ‘綿면’은 ‘이어질 면’이다.…그러나 그 다음 말이 ‘若存약존’이다. ‘있는 것 같기도 하다’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한 ‘면면綿綿’의 뜻은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낱간이 희미하게 이어진 모양’이다.…다시 말하면 이 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필링은 ‘길게 이어져 있는’ 감이 아니라 ‘실낱같이 가늘어서 분간이 잘 안 되는’ 감을 받아야 한다. 이게 원문에 대한 올바른 감상법이다. 그래서 노자는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이경숙 완역본,P118~119)

‘이’의 해석, ‘있는 것은 같으나 쓰임(새)은 없느니라’는 의미상 맞아 보이나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아니다. 즉 이문장이 나의 번역, ‘영원토록 이어져 있는 것은 같은데 (그래서 있다면 인간처럼 어디에 쓰임이 되고자 힘쓸 것인데 그 무엇은 전혀) 쓰임은 힘쓰지 않느니라’와 같이 이해될 경우 이 둘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

‘이’는 ‘그 무엇’은 ‘쓰임이 없다’고 보는 입장인 반면 난 ‘쓰임이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도라는 ‘그 무엇’ 스스로는 쓰여지려 애쓰거나 부지런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천지의 창조와 같은 쓰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보인다.

누가 부지런하지 않다는 것인가? 바로 ‘그 무엇’이다. 무엇에? ‘쓰임에’ 그렇다는 것이다. ‘완벽한 것은 쓰이고자 하지 않아도 오직 쓰임만이 있을 뿐이다’는 뜻이 이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도덕경의 전체가 그것이다.

앞의 제4장 ‘이용지혹불영’과 연결해서 이야기하면, ‘도는 텅 비었으나 그 빈(차있지 않은) 것이 쓰인다. {우주의 有(유)는 모두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단 쓰임은 근면하지 않다. 즉, 힘쓰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정리하면 쓰임은 이미 4장에서 했고 여기는 쓰임의 표현인 것이다. 당연히 ’쓰임이 없다‘는 아니다.)

※ 완역본은 보다시피 若을 ‘같다’로 바르게 고쳤다. 그리고 면면도 내가 푼 것과 흡사하고 若存의 해석도 같으나 ‘용지불근’은 역시 바르게 풀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다? ‘용지불근用之不勤’이 되는 것이다. ‘쓰고자 하면 게을러서 쓸 수가 없다’이다. 쓸려고 들면 쓰임새가 없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제4장에서 나왔던 ‘이용지혹불영而用之或不盈’, 즉 ‘쓰고자 하면 채워져 있지 않다’와 같은 의미, 같은 표현인 것이다.(이경숙 완역본,P119)

악역은 틀린 것이 아니며 뜻을 반감시키는 직역도 아니다. 맞은 것처럼 틀려있는 것이다. 달변으로 치장해 놓아 독자로 하여금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덕경은 꾸밀 필요가 없는 경전이다.

생략된 설명 글만 삽입하거나 어려워 보이는 문장만 풀면 된다. 5천자의 경전이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반야심경이 260여자요, 대학이 160여자라는 것을 보면 5천자가 얼마나 많은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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