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5장》

   
①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②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③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전문 번역]
天地(천지)는 不仁하여 만물로써 풀 강아지를 삼는다.
聖人(성인)은 (또한) 불인하여 만백성으로써 풀 강아지를 삼는다.
(천지나 성인이 사랑이 없어서 만물과 백성에 ‘불인’일까. 아니다.

그들은 이미 ‘어머니’가 ‘의미’를 부여한 ‘고귀체’들이기 때문이다. 천지나 성인은 그 뜻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모습으로 살다 가도록 옆으로 비켜섰을 뿐이다. 완전한 사랑은 모든 것을 주고도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어떠할까?)

하늘과 땅 사이, 그것은 마치 풀무와 같으리라. 비었으나 꺾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폭풍우와 뇌성번개처럼 많은 것이) 흘러나온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니 인간들도)
말이 많으면 막힘이 잦으니 (고요히) 흉중에 (넣어두고 말없이) 지킴만 같지 못하니라.

[나의 역해서와는 ①,②,③의 번역을 조금 고쳤고, 기존과는 역해에서 많이 다르다]

이 장은 도(어머니)의 자식 중 가장 어머니의 말씀을 바르게 따르는 천지와 성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삶도 중심을 읽고 움직이면 많은 것이 흘러나온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말인가?

기존의 해석서는 글이 도대체 앞뒤가 이어져 있지 않는 것처럼 보여 문장 전체를 이해하지 못해, 후세가가 짜깁기한 것처럼 설명하는 분도 있다. ( )를 보듯 삽입이 상당히 많아야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여기도 바른 번역이 되지 않음으로 오역이 되어 지고 이해가 안 되었을 뿐이다.

≪說(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天地(천지)는 不仁하여 만물을 풀 강아지로 삼는다. 聖人(성인)은 (또한) 불인하여 만백성을 풀 강아지로 삼는다.

현상계에서 도(어머니)의 뜻에 가장 바르게 따라가는 것으로서 노자가 생각하는 것은 자연에서는 ‘천지’며 인간에게서는 ‘성인’이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대상(백성,만물)을 바라볼까? 바로 ‘불인’하여 ‘추구’대하듯 한다고 한다. 불인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까? 여기서는 ‘관심이 없다’ ‘무심하다’ 등으로 譯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仁(인)은 도덕경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지도이념에 사용된 덕목중에 하나쯤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儒家(유가)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그것을 부정한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제38장에 보면 ‘도덕인의예’가 모두 사용되는 것을 보면, 노자는 분명 지도층이 사용하는 덕목의 개념을 생각하고 썼을 것이다.

따라서 인에 대한 이해는 유가쪽의 책을 읽는 것이 좋아 보인다. 유가 쪽의 입장에서는 하늘의 도가 인간사에 발현되는 것이 ‘仁(인)의 정치’라고도 말하는 것 같은데, 여기의 표현은 그것은 아닌 것 같고, 4단7정으로 표현되는 인을 생각해보면, ‘관심과 접촉, 그리고 간섭’ 즉,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인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이 불인을 도올은 ‘잔인하다’로 번역하여 엄청 까졌다.

‘추구’는 '풀로 만들어진 개'라는 뜻인데 지나인이 제사를 지낼 때 제상에 만들어서 올려놓는 물건이란다. 즉, 구색을 맞추기 위해 올려는 놓았지만 전혀 관심도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 문장은 ‘무관심’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부분은 맞다. 그렇지만 제2장에서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여기에 이어보면 모든 만물은 태어나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하지 말라’는 의도가 더 강하다. 무관심하면 사랑이 없는 듯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접근법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노자성인의 글은 접하기 힘들 것이다.

아무튼 여기의 불인은 '사랑이 있어 베풀지만 제 스스로 살아가도록 간섭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가장 맞아 보인다.

기존의 번역을 보자.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P157)
천지는 정이 없어서 만물을 추구(芻狗)로 삼았고, 성인은 정이 없어서 백성을 추구로 삼았다.(노태준, 노자도덕경,P40)

하늘과 땅은 인자함을 지니지 않아, 만물을 초개(草芥)처럼 버려 두고, 성인은 인자함을 지니지 않아, 백성을 초개처럼 버려 둔다. (박일봉, 노자 도덕경,P25)

모두 ‘불인’에서 어려웠다는 것이 보인다. 노는 ‘정이 없어서’ 박은 ‘인자함을 지니지 않아’로 번역한 것처럼 번역으로는 쉽게 우리말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해석이 틀리지 않다면 어떤 번역도 잘못이다 할 수는 없어 보인다.

※ 이 장의 여기서 내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부분을 말해야겠다.
以萬物爲芻狗, 以百姓爲芻狗의 문장 중 ‘以(이)~爲(위)~’는 한문문장의 숙어다. 이렇게 되어있는 문장은 ‘~을 ~으로 삼다. ~으로써~을 삼다.’로 번역이 된다. 기존은 ‘~을~으로 삼다’로 번역을 하고 있고, 나는 이 둘 다를 사용하였다.

문제는 ‘~을 ~으로 삼다’와 같은 번역은 ‘술어 앞에 목적어가 위치함으로’ 한문 문법을 벗어난다는데 문제가 있다.(백성을 추구로 삼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런 번역을 ‘틀리다’고 지적했었다. 특히 이 책을 번역할 당시는 以(이)를 ‘생각하다’의 훈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사전에는 ‘생각하다’라는 훈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문법적 판단을 유보한다. 상당히 여러 예문으로 더 연구를 해야 할 문장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만 간략히 말한다면, ‘만물’과‘추구’란 명사를 ‘~을 ~으로 삼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시, ‘추구위만물’처럼 표현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이럴 경우 ‘이것 한가지만으로 번역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러 가지 번역을 동반한다. 따라서 이 문장의 명확한 구분을 위해 목적어인 ‘만물’을 앞으로 내면서 ‘만물의 서술적 용도’로 '의미 없는 어조사' 以(이)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그러나) 하늘과 땅 사이, 그것은 마치 풀무와 같으리라!
비었으나 꺾이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흘러나온다.

이 문장은 기존번역과 ‘이’의 번역이 다르며 해석도 다르다. 이 문장을 갖고 출판당시에는 엄청 몇 날을 소비했었는데….

지구와 같은 천체는 우주에 떠있다. 노자도 달이나 별무리를 보며 지구도 마찬가지로 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일고 강이 범람하는 날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노자는 우주의 본 모습은 고요함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것을 ‘탁약’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찌그러지지는 않을 뿐이지만 /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하늘과 땅 사이는 그것은 오히려 풀무와도 같지 않는가? 비어있어서 꺾이지 않지만 움직일수록 흘러나온다.(도올)
하늘과 땅 사이는 그 커다란 풀무와 같도다. 텅 비어서 끝남이 없고, 움직이면 만물이 쏟아져 나온다.(박일봉)

보는 바와 같이 ‘이’는 ‘천지기간’과 ‘기유탁약호’를 각기 ‘허이불굴’과 ‘동이유출’에 연결하여 설명하여 나와 다르고, 도올은 상당히 번역이 좋고, 박은 ‘동이유출’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거라 생각한다. 물론 ‘탁약’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도 기존과 ‘이’가 다르다.

기존의 글들 중 ‘이’의 글을 위주로 비교한다.
풀무라는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고 강강익선(强强益善)이다. 많이 나오고 세계 나올수록 좋은 것이 풀무의 바람이다. …이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노자는 ‘뭔가 많이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풀무‘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절구와 피리는 이 경우에 대단히 적합한 비유가 된다. 절구는 너무 심하게 절구질을 하면 곡물가루가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고… 그러면 노자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만 알면 된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광대한 공간은 텅 비여 있어서 그것(빔)의 소용은 다만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의 속은 똑 같이 비어 있으면서도 그것은 움직일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빔‘이라도 자연의 ’빔‘과 인공적인’빔‘은 다르다는 것이다.(노자를 웃긴 남자,P136~139)

글을 정리하면, ‘이’는 풀무는 셀수록 좋은 것이라고 봄으로서 뒷말과 연결이 안 된다고 판단하였으며 자연(천지)의 빔은 다만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인공의 빔(피리,절구)의 빔은 움직일수록 경망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을 비교하고자 노자는 천지지간은 허이불굴에 기유탁약호는 동이유출에 연결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다. 물론 해석은 하나는 비었으되 하늘을 떠받고 하나는 쫄삭거리되 많은 것(소리, 나락)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비어있을 뿐 꺾이지 않는다(허이불굴)’는 말이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 ‘이’의 해석을 보자.

그러나 천지사이의 공간은 열심히 움직이지 않아도 부지런히 애쓰지 않아도 그 빔은 비어 있다는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바로 찌부러지지 않고 우주를 받치는 허이불굴(허이불굴)인 것이다(P140)

즉, ‘허이불굴’은 우주에 떠있는 수만은 별들이 바로 텅 비어있으되 꺾이지 안음으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꺾이면 어떻게 될까? 우주의 대폭발이나 유성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결국 빔이 그 충돌을 막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동이유출’은 번역처럼 기존은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 즉, 부정의 말을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노태준의 글을 보면 다음에 이어지는 ‘다언삭궁’과 연결이 되지 않아 사이에 없는 말을 만들어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세상에 하나있는데~)‘다언삭궁’ 앞에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풀이했듯이 여기서 ‘허이불굴 동이유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지간’이며 그것을 절구나 피리 또는 풀무를 빗대어 ‘그것이 비어 있지만 平心의 고요함을 잃어버리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더 넘쳐흐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누가 그렇다는 것인가? 바로 어머님의 뜻에 따르는 천지(지간)가 그렇다는 것이다. ‘(도의 뜻에 따라) 개풀 보듯 만물을 바라보는 천지도 움직일수록 흘러 넘치는데 우리 인간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바로 이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글(다언삭궁~)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풀어짐으로서 제23장도 바르게 연결이 된다. 결론은 ‘천지지간을 탁약에 비유했고 비유한 이유는 虛(허)와 動(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탁약’은 ‘전대 탁’ ‘피리 약’이다. 이의 해석으로 기존은 풀무라 하고 이는 피리와 절구라 했다. 이것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이’가 해설한 풀무는 바른 해석이라 하기 그렇다. 문장을 보면 ‘세다 안세다’의 문제가 아니라 ‘허’와 ‘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수궁 부여수중)

말이 많으면 궁함(막힘)이 잦으니 흉중에 지킴(넣어둠)만 같지 않다.

이 장의 결어다. 사람의 언행은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말은 어떠한가? 그래서 어때야 하는가? 바로 ‘말 좀 조심해서 살아라’하는 말이라고 보여 진다. 말 좀 조심하라고.
근데 이 문장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보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많은 해석서가 그런 식으로 하고있는데 한번 생각해보자.

위의 8자를 도식해보면 多言을 이야기하고 있지 無言을 이야기 하고있지 않다. 다만, 多言보다는 胸中이 더 낫다는 거다. 그럼 흉중보다 더 나은 거는 없나? 난 있다고 본다. 어쩌다 한번 내뱉는 말마다 상대방에게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복을 주는 말이라면 어떨까? 그 사람보고 주둥아리 닫으라고 할까? 당연히 신중한 말은 있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장은 내가 보기에 말에 대한 경계지 ‘아예 입 닥쳐’라는 말은 아니다.

※ ‘이’의 책 ‘노자를 웃긴 남자’를 보면 이곳을 설명한 곳에서 연산군의 黙言牌(묵언패) 이야기가 나온다. 쉬어가는 셈치고 전문을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였잖아.(노자를 웃긴 남자,P141)

※ 연산군이 대신들에게 걸어주었다는 것은 愼言牌(신언패)라 불렀다. 묵언패는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자 하여 安居에 들어가면서 문밖에 걸어 놓는 패라고 한다.

口是禍之門 (구시화지문)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 (설시참신도)세치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
閉口深藏舌 (폐구심장설)입을 다물고 깊이 혀를 숨겨
安身處處牢 (안신처처뢰)몸을 보호하라. 處處가 감옥이니!(1)

입은 화의 문이요
세치 혀는 몸을 베는 칼이도다.
입을 다물고 깊이 혀를 숨긴다면
어찌 몸이 머무는 곳이 감옥이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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