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3장≫ (7)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 無知無欲 使夫智者 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시이 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상사민 무지무욕 사부지자 불감위야 위무위 칙무불치


이렇기 때문에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대신 그 배를 채워주고, 백성의 뜻을 약하게 하는 대신 그 몸을 튼튼히 해주어서 늘 백성들로 하여금 아는 것과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없도록 하였느니라.

(반면에) 대저 지혜롭다하는 자들은 감히 꾸미지 못하도록 시켰으니 (다스리는 자가) 꾸며도 꾸밈이 없(는 것처럼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是以란 ‘이렇기 때문에, 이로써’다. 이 말은 故(고)가 원인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면, ‘시이’는 이것을 중심으로 앞의 말은 결과물, 현상 또는 답 글이며 뒤의 글은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겠다는 글이다. 따라서 성인이나 왕이 是以 다음 글처럼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문장 즉, 이유가 되는 글은 앞 不尙賢부터 使民心不亂까지가 된다.

 

여기서 노자는 다스리는 자에게 세 가지 것에 대하여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불상현’은 지식(덕망)이나 학식욕에 관한 것이며 ‘불귀난득지화’는 재물욕이며 ‘불현가욕’은 의지를 나타낸다. 노자가 다스리는 자에게 그러한 것을 취하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면 是以 이하 성인은 그러한 것을 버리는 방향으로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쓴다면 각자는 이미 어머니가 준 고유성이 있으며 다스림이라는 것은 특별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듯한 무위자연이 가장 이상적인 다스림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성인의 다스림은 그(백성) 마음을 비우게 한다. 마음이 동하면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더욱이 마음이 가득 차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뺏어서라도 채우지 않고는 못살 것이다. 욕심을 비우게 하는 방법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반면,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백성의 배를 실하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노자성인의 생각에는 배와 튼튼한 몸이다. 또한 그 뜻을 약하게 해야한다. 백성이 뜻이 강하면 욕망이 생겨난다. 욕망이란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온다. 출세욕, 금전욕, 온갖 욕심은 마음이나 뜻이 강할 때 생겨난다. 반면에 어찌해야 하는가? 그 뼈를 강하게 해야 한다. 배나 뼈는 몸을 대표하는 용어로 보면 될 것 같다. 몸을 편안하게 하여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처럼 성인은 늘 백성들을 무지 무욕하게 시켰다. 이것은 마음과 뜻이 백성을 스스로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노자의 생각에 부자연스러움의 가장 대표되는 것이 生心과 立志라고 보여진다. 마음이 동하면 탐심이 생기고 뜻을 세우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스스로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노자는 경계하였다.

그들은 어려움이 없다. 어느 정도의 순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것을 깝죽거리는 인물들은 어찌하는가? 그들은 이미 지식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지식을 사용하여 꾸미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使夫智者不敢爲也라 쓴 것이다. 감히 꾸미지 못하게 시켰다는 것이다. 왕에게나 백성에게 잔꾀를 부려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손을 비벼 출세나 부자가 된 지자가 있다면 그 놈은 그 맛에 젖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어 버릴 것은 뻔한 것 아닌가!

 

아무튼 이 문장은 백성에게 무지무욕하게 다스리는 것도 성인이요, 지자에게 감히 꾸미지 못하게 하는 것도 성인이라고 보면 된다. (※ 智者를 중간 관리자로 보는 사람이 있다.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제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정치술의 정점에 있는 말임으로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먼저, 이경숙의 글을 인용한다.(※내가 철학적 소견이 깊다면 다른 분의 역해서를 인용하지 않고서도 글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의 나로서는 주문에 가까운 말이라 어쩔 수 없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도올)

반면에 다스리는 자들은 꾸밈이 없어야 한다. 꾸밈이 있더라도 백성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노자를 웃긴 남자, 이경숙님)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노자에게 감탄하고 반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도덕경》은 여러 번 탄복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는데, 물론 그것은 《도덕경》의 뜻을 제대로 알고 읽을 때의 이야기다. 도올처럼 엉뚱한 동네에서 지 혼자 노는 사람은 음악회 가서 언제 박수를 쳐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나 같고, 개그나 코미디를 보면서 웃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과 같다.

노자의 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노자한테 감탄하며 노자한테 반했다고 말하는지 불가사의 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탄복해야 할 대목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가고 별 의미도 없이 해놓은 소리를 붙잡고 자기 혼자 끔뻑 죽기도 한다. 뜻도 모르는 책을 읽고 감탄을 하고 반할 수 있다는 것도 도올만의 기발한 개성이고 재주겠지

도올은 저 구절을 풀어 뭐하고 하는가 하면,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라 했거든. 도올은 󰡐함이 없음󰡑을 너무 좋아하는 게 탈이지. 뻑하면 들고 나오는 것이 󰡐함이 없음󰡑인데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함이 없음󰡑이 뭐야? 지금 철학강의를 하는 건지 말장난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온 사람이면 󰡐위무위(爲無爲)󰡑의 뜻이 어렵지 않을 거야. 이게 어려울 게 뭐 있느냐 말이다. 󰡐무위󰡑가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 거라 했잖아. 그러면 󰡐위무위󰡑는 뭐겠냐? 바로 꾸미지 말고 하라󰡑는 말이거나 하라는 말이거나 󰡐꾸미지 않은 것처럼 꾸민다󰡑는 말이다. 즉 정치를 함에 있어서 완벽한 무위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무위한 것처럼 꾸미기라도 하라는 말이다. 즉 백성을 어쩔 수 없이 속여야할 경우에도 백성이 속는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속이라는 정치술의 요체를 말하고 있는 거다. 그게 바로 󰡐위무위(爲無爲)󰡑다.

현실 정치에서는 무위의 치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위(無爲)를 위(爲)하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노자의 위대함이 있다. 무위(無爲)가 어렵다 해서 유위(有爲)를 택하지 말고 무위(無爲)를 위(爲)함으로써 현실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P81-83)

이것은 예전 도올을 비판했을 때 사용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것을 완역본에는 ‘無爲’만 ‘꾸미지 않음’으로 해석했을 뿐 기존서들의 해석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돌아가 버렸다.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즉무불치 : (식자 또는 지도층이) 꾸밈이 없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완역본, P92)

‘위무위’는 ‘무위(꾸미지 않음)를 한다’는 중복 문장이다. 즉, 앞의 爲는 무위를 강조하는 글자로, ‘꾸미다’는 뜻이 아닌 '하다'는 뜻의 爲인 것이다. '무위로서 한다'가 되겠다.(완역본 해설,P94)


보는 바와 같이 번역을 처음과 바꾸면서 해설은 인용한 것이 전부다. 이 제3장 전체로 보아서 어찌보면 정치술로서는 이것이 결론에 이르는 말인데 처음에 비해 넘 간단하게 넘어가 버렸다.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지만 지금부터 이야기 해보자.

‘爲無爲(위무위)’는 ‘꾸며도 꾸밈이 없는 것처럼 하는 것’ 또는 ‘꾸밈이 없는 듯 꾸미는 것’이 정답이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것 중에 ‘도가 덕이 되어지는 것(제21장)’, ‘도상 무위이 무불위(제37장)’ 그리고 노자성인이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 계속하여 외칠 ‘박(제28장 등)’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궁극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제59장)’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이런 글을 종합해 보면, 성인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가 아니다. 극점에 도달하여 더 이상 極이 없는 곳(상태)에 이르렀을 때를 말한다. 그때는 생명이 최초로 발아하는 것이요 만물이 태동하는 것이다. 즉, 성인은 우주의 시원과 일치되는 사람을 말한다. 내가 깨달음이 없어 결론은 내릴 수 없으나 읽어보면서 그런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면 아직 도덕경에서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접할 단계가 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도의 제1의 성질이 무엇일까? 다음 장에 나오는 冲(충)이다. 즉, ‘텅 비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천지만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있는 문장이 ‘道常 無爲而無不爲(제37장)’다. 즉, ‘도는 영원히 꾸밈이 없어서 꾸미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爲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꾸민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無爲는 도의 ‘절대적 순수’를 이르는 말이다. 그냥 꾸밈이 없는 것 정도가 아니다. ‘절대순수’다. 쉽게 뱉어낼 단어가 아니라는 사고를 먼저 해야한다. 그러면 ‘無不爲’는 ‘꾸미지 못할 것이 없다’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노자가 궁극적으로 외치는 말이다. 완전한 극에 이르렀을 때 누구도 신하로 하지 못하고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왕은 저절로 되어진다는 것이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이다.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인 순수함이 자신의 ‘무위’라면 그처럼 순수함으로서 꾸미지 못할 것이 없어서 만들어 놓은 세상이 ‘무불위’라는 것을 누구도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최고의 정치,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는 정치는 바로 ‘꾸밈이 없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꾸밈이 있는 자라면 꾸밈이 없는 단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코 오래일 수 없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전체를 생각지 않는다면 다시 읽어도 또 헷갈릴 것이다.

 

 제59장에 보면 ‘백성이 重積德者(중적덕자)의 깊이를 모를 때 드디어 중적덕자에게 나라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도의 眞相인 冲이 佛家의 空과 같이 ‘텅 비었음’인데도 불구하고 이 우주만물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바꾸기 전에는….


만에 하나 성인이 생각하기에 백성을 위해 꼭 해야할 사업인데 백성은 고유성만을 갖고 있음으로 힘이 든다든가 아니면 지금 필요한 사업이 아니라하여 하기 싫어하는 사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아님 시키는 것 같지 않게 시켜야 할까? 예를 든다면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성을 쌓아야 하겠는데 백성이 코앞만 내다보고 힘들어 할 것 같으면 말아야 할까? 앞에서 몇몇을 선동하여 스스로 하게 하면 나머지 백성도 스스로 따라가지 않을까? 꼭 선동정치 같지만 아무튼 ‘스스로 하게 한다’는 것이 내 말의 포인트다.


노자는 政治術(정치술)의 結語로 이 말을 한다.

‘꾸미더라도 꾸밈이 없는 것처럼 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고.

이 문장이 그동안 기존의 학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無爲(무위)를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노자성인의 말이라고 생각되었었는데(무위자연처럼) 갑자기 爲無爲(위무위)가 나와 버리니 도치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行爲(행위)다. 그래서 모두 ‘無爲를 행하면’이라 풀고 또 ‘無爲(무위)’는 ‘함이 없음’으로 풀었다.(도올의 번역 참조) 반면 ‘이’는 ‘무위’를 ‘꾸밈이 없음’이라 번역했음으로 같은 모습은 아니나 정작 아니함만 못하게 번역하였다.

(식자 또는 지도층이) 꾸밈이 없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이것은 ‘無爲’를 풀어서 번역을 했다고 봐야지 어떻게 ‘爲無爲’가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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