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지위 차별 않는 양형…전관예우 근절 기대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 법조계 전문가와 민간 위원들로 구성된 양형위원회가 2일 사법 불신의 뿌리인 고무줄 양형을 해결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1기 양형위원회는 법원조직법에 따라 2009년 4월 26일까지 양형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부패 범죄와 성폭력 범죄, 소년 범죄, 환경 범죄, 선거 범죄 등을 우선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양형위원회는 죄질과 피고인의 책임 정도, 범죄 예방과 재범 방지, 범법자의 사회 복귀 등 범죄 외적 요소까지 모두 고려해 법관이 참고할 수 있는 양형 기준을 만들어 공개해야 한다. 법원조직법은 양형위원회가 양형 기준을 만들면서 피고인의 국적ㆍ종교ㆍ양심은 물론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양형상 차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명문 규정도 두고 있다.

그동안 법관의 재량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에 매달려 일반인이 언뜻 보기에도 납득할 수 없는 형량의 편차마저 인정했던 양형 시스템의 대대적 수술이 시작된 셈이다.

◇ 반복되는 `유전무죄 무죄유죄' 논란 = 권력과 금력 앞에서는 쇠방망이도 솜방망이로 바뀐다는 사법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1988년 10월 일어난 지강헌 일당의 탈주 사건 때 공분으로 표출됐다.

상습절도죄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이 선고돼 17년의 형기를 채워야 했던 지강헌의 탈주극은 처참한 자살극으로 끝났지만 그가 말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불과 몇달 전인 1988년 3월 새마을본부 중앙회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는 공금 76억여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전씨는 이듬해 5월 징역 7년과 벌금 22억원, 추징금 9억8천900만원이 확정됐지만, 1991년 2월 노태우 대통령 취임 3주년 기념 특사에서 잔여 형기를 절반으로 감형받은 데 이어 같은 해 6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20년 가까이 흐른 2006년 7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은 회삿돈 286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박 전 회장 등 총수 일가는 1995년부터 거액의 회삿돈을 가로챈 사실이 드러나고도 구치소 문턱조차 밟지 않았고, 형이 확정된 뒤 6개월 만인 올 2월 `경제살리기'라는 이유로 사면까지 받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두산그룹 총수 일가의 비리 사건과 관련해 1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다음날 고등법원 부장판사들과 만찬 행사에서 화이트 칼라 범죄의 엄단을 강조했지만 5개월 뒤 나온 항소심 판단은 1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벌 앞에 약한 사법부,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이 불거졌다. 들쭉날쭉한 고무줄 형량의 편차를 줄이려는 양형위원회 설치 시도는 1990년부터 계속 있어왔다.

그러나 법관의 독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고 양형위원회가 설치돼도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회의적인 목소리는 개선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사회의 이목을 끄는 사건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이 되풀이되자 양형의 적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마침내 2003년 출범한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는 양형위원회와 참고적 양형기준제 도입에 합의했다.

◇ 처벌 예측 가능…방대한 DB 확보 필수 = 양형기준제도는 범죄의 경중과 범인의 전과 등을 세밀히 검토해 미리 정한 형의 범위 내에서 형을 선고하는 시스템으로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다.

양형위원회는 운영지원단의 양형자료분석관이 수집한 수십년 동안의 양형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양형 인자를 뽑아 우리 재판 현실에 맞게 편차를 최대한 줄인 기준을 마련하게 된다. `범죄 행위의 불법에 상응하는 적정한 양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기준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양형위원회는 뇌물죄 등 부패범죄 뿐 아니라 살인 등 사망 결과가 생긴 범죄를 비롯해 발생 건수가 비교적 많은 교통사고 관련 범죄, 사기 범죄 등도 1차 양형기준 설정 대상 범죄로 정했다. 범죄 예방 차원에서 형별 효과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양형 정책이 단순한 처벌에 그치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법률에 근거해 설치된 양형위원회는 1기 활동 종료 이후에도 존속하기 때문에 기존 양형 기준을 수정, 보완하면서 다른 범죄의 양형 기준도 마련할 수 있어 지금과 같은 판사의 `무한' 재량권은 상당부분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양형 기준이 공개되면 형사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어느 정도 처벌을 받을지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합리적으로 형량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학연과 지연을 동원한 전관예우는 설 자리가 없게 되고, `묻지마 항소'도 상당부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 `국가와 사회에 기여' 감형사유 사라지나 = 정치인, 기업인을 처벌하면서 마땅한 감형 사유가 없을 때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게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공로였다.

세간의 이목을 끈 대형 비리 사건 재판에서 오랜 세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감형한다는 양형 사유는 국민 대다수에게 허탈감을 주었고 심지어 만평의 조롱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법원조직법이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양형에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두었지만, 이런 저런 포장을 씌워 사회적 신분에 따른 감형 사유가 양형을 결정하는 인자로 인정될 경우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법원 일각에서 양형 기준 도입을 논의하는 초기에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던 점도 양형위원회가 넘어서야할 부분이다. 양형기준 마련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사법부에 도입을 제안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는데, 당시 법원에서는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지적도 있었다.

내년부터 도입되는 배심제가 정착되고 양형기준이 마련되면 법관의 재량권은 크게 축소될 수 밖에 없어 일선 법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 수 없다. 유ㆍ무죄를 배심원단이 판단하면 판사는 양형 기준에 따라 형량만 정하면 되기 때문에 피고인의 유ㆍ무죄와 형량 결정권까지 갖고 있는 지금에 비해 법관의 역할은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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