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한미 FTA가 본격화되면 이렇게 변한다는 게 말이 돼?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며칠 전 학교에서 경제 신문을 한 뭉치 가져온 고등학생 딸이 다짜고짜 대들듯이 물었다.

딸이 씨근벌떡 거리며 건네준 신문에는 가상 고등학생 ‘*경이의 하루로 본 한미 FTA로 달라진 생활’이란 제목의 글이 있었다. 그 글에 나온 쇠고기를 좋아한다는 이 가상 고등학생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본격화되면 12월 생일에 친구들과 안심 스테이크를 폼 나게 썰어볼 꿈에 부풀어 있다.

귤과 오렌지를 다 좋아하는 그 학생은 겨울엔 한국산 감귤, 여름엔 미국 산 오렌지를 골라 먹는 재미를 생각하며 행복해 하고, 폴로 티셔츠나 나이키 신발 가격은 예전과 변함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면서도 미국산 게임기와 아빠 골프채 가격이 내렸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한다.

질질 늘어지는 우리나라 드라마 대신에 즐겨본다는 케이블 TV의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3이 미국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다는 사실에 기꺼워하며, 속으로 ‘한국 영화인들은 관객들을 바보로 아나 봐. 스크린 쿼터가 무슨 상관이람. 영화만 좋으면 알아서 다 보는데…’라며 단칼에 정리한다.

저작권 보호 기간이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 미국 현대 작가들 책값이 떨어지려면 2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며 조금 섭섭해 하면서도 고등학생답게 저작권 보호 대상에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의 윙윙거리는 소리까지 상표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알고는 ‘세상이 참 재미있게 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글의 마지막 줄에 ‘세상이 참 재미있게 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가상 고등학생과 ‘세상이 참 무섭게 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현실의 고등학생인 내 딸 사이의 간극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옆집에 살았던 친구가 생각났다. 지지리 궁상이었던 70년대 초반에 리본 달린 블라우스에 고급스러운 공단 치마를 입고 언제나 반짝거리는 에나멜 분홍색 구두를 신고 다니던 내 친구는 더럽고 구질구질한 동네 놀이터 대신 집 앞마당에 아빠가 손수 제작해서 설치해 준 철제 그네를 타고 놀았다.

부잣집 친구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날이면 그 아이는 캐비닛 속에 꼭꼭 숨겨둔 미제 커피와 프리마를 한 숟가락씩 퍼서 내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우유도 아니고 미숫가루도 아닌 그 프리마의 맛은 너무도 오묘해서 개처럼 손바닥이 닳도록 혀로 핥아대는 나를 보며 그 친구는 그게 ‘미제의 맛’이라고 했다.

한국 로컬 타임으로 점심때는 미국 본토 시간으로 아침때니까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먹어야 한다면서 그 아이는 식모더러 미제 라면을 끓여 내오라고 했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포장지가 빨간 삼양 라면인데도 그 친구는 미제라고 벅벅 우겼다.

라면을 먹은 다음에 디저트로 미제 냉장고에 얼린 미제 아이스 샤베트를 내오라고 식모에게 부탁하면서 친구가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언니, 샤베트 잘 익었능가 젓가락으로 찔러보소잉.” 그때 집에 냉장고가 없었던 나는 얼음은 어는 게 아니라 익는 게 아닐까 싶은 황당무계한 생각을 지금까지 하곤 한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미제라고 우기고, 한국 시간을 언제나 미국 시간으로 환산하고, 광주 촌년이 미국 뉴욕의 세라라고 착각한 그 친구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려면 사천왕처럼 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친구의 아빠에게 먼저 물어봐야만 했다. “정신이 있어요?”라고. 지금 딸은 내게, 그리고 한미 FTA를 추진하고 옹호하는 어른들에게 묻는다. “정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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