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을 넘어, 죽음을 넘어 하나 된 대동세상을 만나고 싶다면
5·18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민중·민족과 함께하는 문학인이라면 5·18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깊은 상처를 함께하면서,
사회가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는 데 솔선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게 우선"

1980년 5월 18일 아침, 금남로 1가 진헌성 내과 담을 넘어 끼치는 라일락 향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금남로에는 아침부터 최루탄 가스가 물안개처럼 퍼져 눈을 못 뜨고 콧물을 줄줄 흐르게 했다.

당시 최루탄은 그야말로 지독한 것이어서 쏘아대는 최루 가스에 노출되는 순간 모든 행동 의지를 상실할 정도였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1980년 광주의 봄은 이렇듯 코끝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라일락 향기를 누르며 독한 최루탄 냄새가 금남로 하늘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5월 15일 저녁 금남로 1가 도청 앞 분수대 일원에서 전남대 교수단과 학생, 시민들이 모여 가진 민주화 대성회 후 당시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 중심으로 모인 학생들은 교정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어서 광주 운동권 인사들 및 대학 총학생회 등에는 금명간 전두환 군부독재 세력 발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에 위수령이 내려져 군대가 진주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에 따라 그날 밤 마무리 집회는 매우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고, 연단에 선 학생회장 박관현 씨는 계엄령이 선포되면 우리 모두 대학 정문 앞에 모여 학교를 사수하자고 제안하였고 참가자들은 이에 모두 동의하였다.

1978년 일제의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민교육헌장 반대를 선포한 민주교육지표 사건으로 제적과 투옥을 거쳐 대학에 돌아온 나는, 당시 전남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외우 문승훈 등과 함께 학생회 멤버들에게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해 조언하는 등 1980년 민주화의 봄이 활짝 꽃피기를 기원하던 터라, 5월 18일 새벽에 라디오에서 군가와 함께 울려 퍼지는 계엄령 소식을 치떨리는 기분으로 듣다가, 약속대로 오전 9시경 전남대 정문 앞으로 달려갔다.

이후 10시반까지 속속 정문 앞으로 모여든 학생들과 함께 대학가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몇 차례의 공방이 이어지면서 착검을 한 채 진압에 나선 계엄군에 의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같은 유혈 사태에 직면하여, 시위대 연단에 여러 번 섰던 나를 알아본 전남대 독문과 이광호, 국사교육과 안정애, 친구 김옥준의 동생 등 여러 학생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상의해 왔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그 무렵 부마항쟁 관련 소식을 마산 친구 유동렬로부터 생생하게 전해 들은 경험을 살려, 여기서는 무고한 희생만 벌어질 테니 금남로로 가 시민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고 함께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에 따라 200여 명의 학생들이 네 명씩 줄을 맞추어 10시 반 무렵 금남로로 출발했다.

행진하면서 우리는 “전두환은 오판 말라! 민주화를 실행하라!”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11시경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우리들을 보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격려의 박수를 쳐주었고, 소식을 들은 학생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전남대 사학과 조현종(전 광주박물관장 역임), 성균관대 철학과 은우근(전 광주대학교 교수), 전남대 농대 이일승(신협중앙회 근무) 등 친구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금남로에서 합세한 학생들과 힘을 합쳐 오후 1시 너머까지 전경대를 중심으로 한 경찰들과 도청 진입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당시는 민주화 움직임도 있어서 경찰들도 곤봉 등 무기를 사용하여 무리하게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

산발적으로 쏘는 최루탄도 직격으로 쏘지 않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시위대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떨어지게 하는 등 대응이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하지만 모종의 명령이 있었는지 시위대가 가톨릭센터 너머 도청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치안 당국과 시민들의 밀월은 거기까지였다.

오후 들어서자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을 접하고 분노한 시민들이 속속 금남로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오후 1시 반 즈음이 되었을까, 금남로 연도에 1만여 명이 훨씬 넘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경찰도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않고 저지선 지키기에만 집중했다.

2시 즈음이 되자 가톨릭센터 일대에 구름같이 모여든 시민들이 경찰을 에워싼 형국으로까지 반전되었다.

그때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민들을 헤치고 군용트럭 몇 대가 들어오더니 일단의 군인들이 뛰어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몇몇 군인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투입되었거니 했는데, 이들 일단의 군인들은 가톨릭센터 앞 연도에 모인 시민들을 아무런 예고 없이 무차별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려지기로는 계엄군들은 금남로 일대뿐 아니라 광주역, 광주공원 앞 등 시내 여러 곳에 진출하여 무작위로 시민들을 구타하고 대검을 휘둘러 실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에 시민들도 금남로 일대뿐 아니라 광주역, 산수동 오거리 등 시내 전역으로 흩어져 계엄군과 대치하거나 돌팔매로 항거하곤 하였다.

필자의 경우에도 친구 은우근 등과 함께 광주 법원에서 시내로 통하는 장동다리 일대에서 다수의 전경대원들을 생포하고 계엄군에 끌려간 시민들과 교환 협상을 벌이기에 나섰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계엄군은 협상이라는 말도 꺼내 볼 엄두도 나지 않게 시민들을 마구 구타하고 찌르는 통에 상당수의 시민들이 피를 흘리거나 계엄군에 끌려가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날 계엄 당국은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를 즉각 배치했다.

공수부대는 ‘충정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오직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해 온 특수부대였다.

원래 공수부대는 전쟁이 나면 적진에 깊숙이 침투해 중요한 인물을 암살하거나 적의 군사시설을 폭파하는 등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게 주된 임무다.

그런데 이들을 비무장의 시민들을 오열이라고 교육받은 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차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투입된 것이다.

5월 18일 밤까지 수많은 시민들이 시내 전역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이날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은 주유소를 접수하여 화엄병을 만들어 던지기도 하고 몽둥이를 집어들고 계엄군에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날에만 수백 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체포·연행되고 시내 전역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시민들의 희생이 이렇게 많이 나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속칭 ‘화려한 휴가’를 명령받은 계엄군과 맞설 지도부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5월 15일까지 학생운동 지도부를 이끌던 박관현 등의 학생 지도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앞두고 계엄군에 예비검속되거나, 검속을 피했다 하더라도 검거를 피하여 도피하였다.

그나마 5월 18일에는 시내에 남아 있던 일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계엄군에 맞서서 저항하는 등 리더 역할을 일부 수행하였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여기까지 1960년에 4월혁명에서 1979년 부마항쟁에 이르는 해방 후 민중항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시민들이 반민주 독재 세력 및 반헌법적 군부독재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지만, 경찰이나 군대를 동원한 무자비한 강제 진압으로 진압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정치적 후진국의 모습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며 항쟁 대오를 이루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하지만 5·18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일찍이 한국현대사에서 겪어보지 못한 전 시민적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데 의의가 있다.

5월 19일에는 전날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듯 아침부터 봄비가 구죽죽 내렸다.

계엄군은 통제구역을 더 넓혀 금남로 4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아래까지 포진하고 시민들의 진입을 통제했다.

그런데도 오전 10시 즈음부터 시민들은 전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웃들을 신원하고 책임을 묻기 위하여 계엄군 통제선 바로 코밑까지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계엄군은 7공수여단에서 광주 인근의 31사단 병력으로 바뀌어,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가두방송만을 했다.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여 오전 중으로 한국은행 사거리에서 광주공원까지 이르는 길을 가득 채워 버렸다.

이어서 오후 들어 비가 그치자 다시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서 유동 사거리에 이르는 금남로 일대를 수만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물샐틈없이 메워 버렸다.

뿐만 아니라 몇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시위를 주도하면서 “살인마 전두환을 즉각 체포하라! 민주화를 조속히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시위대가 되어 졸지에 소중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책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5월 20일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이 제대로 시민 시위대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웅 31사단장 겸 계엄분소장이 해임되고 소준열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 전남 계엄분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정웅 향토사단장은 1980년 5월 19일 낮에 광주 지역 기관장들로부터 “이러다가는 광주시민들 다 죽이겠다”는 말을 들은 뒤 그날 밤 사단 작전참모를 불러 “지금 이 시간부터 상부의 강경진압명령을 무혈진압명령으로 전환하여 작전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진압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5월 20일 광주 전역에서 반군부 독재, 반계엄 시위가 확산되자 즉각 해임되었다. 

이와 함께 신군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하루에 한 개 부대씩 연속 3일간 광주에 증파하였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18일에는 7공수 2개 대대 688명, 19일 11공수여단 956명, 20일 3공수여단 1,477명 등 2,856명을 차례로 증파하고, 뒤이어 21일, 22일 이틀 사이에는 보병 20사단 병력 4,093명을 내려보냈다.

공수부대와 20사단을 합쳐 모두 6,949명의 추가 병력이 서울 등 외부로부터 광주에 투입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전무후무한 무장 군인들과 맞닥뜨린 셈이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 전역은 물론 광주역 일대, 광주공원 일대에 모여 완전군장한 계엄군에 맞서 싸우자, 계엄군은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로 19일과 20일 내내 시민군 사이를 갈라서 달리며 위협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갈수록 더 늘어났고 이틀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내려는 투쟁을 자발적으로 전개했다.

5월 20일 오후에는 시민의 발인 택시 운전사들이 광주공설운동장 앞에서 집결하여 시민들을 지키기로 결의한 후 금남로 이동하여 계엄군 바리케이드를 밀어붙였다.

이어서 곧바로 버스운수 노조원들이 애마인 버스를 몰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도청 옥상 등에 은신한 시위에 앞장선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여 상당수의 시민들이 희생되거나 크게 부상을 입었다.

이런 야만적인 진압 작전을 주춤하게 만든 것은 일단의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징발하면서였다.

광주시 광천동에 자리잡고 있던 이 공장에서는 장갑차와 지프차 등 군용 차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알려지기로는 계엄군의 만행 앞에 억울하게 희생되어가는 시민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아시아자동차 노조원들이 장갑차 등이 보관되어 있던 창고를 개방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은 제대군인 출신 시민들이 이를 징발하여 금남로로 몰고 왔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그에 따라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소년이 리드하는 장갑차가 시민들을 뒤에 숨긴 채 애국가를 부르며 도청으로 나아갔다.

계엄군은 탱크에 오른 소년을 겨냥하여 쏘았다.

소년이 쓰러지면 시민 시위대가 썰물같이 밀려났다.

그러다가 다시 새로운 소년이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채 나아가다 저격되어 쓰러지고…. 이렇게 나아가기와 물러서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실로 장엄한 시민 시위대의 행진이었다.

눈물개스가 공중에 가득 배어 안개를 이루고 있었다
뜨거운 눈시울 위에
갑자기 납덩이에 맞아 떨어지는 새처럼
장갑차 위로 가슴을 내밀고 나아가던
어린 소년의 죽음이 얹혀졌다
그때마다 바위에 찢긴 파도가 갈라지듯
총소리도 아랑곳없이 이내 다시 달려들어
완강한 바다를 이루어버렸다
다시 장갑차 위로 깃발이 담긴 가슴을 내밀고
나아가던 소년의 목이 하나 더 떨어졌다.
사람들은 쓸쓸한 섬처럼
선지피 낭자한 소년 하나만 남긴 채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는 얼마 안가 다시 장갑차에
깃발을 든 새로운 소년이 오르고
분노로 벌건 얼굴들이
죽은 소년의 일가처럼 바다를 이루었다
죽음의 공포도 사람들을 더 이상 갈라놓지는 못했다
바닷물은 어디서 몰려드는지 몰라보게 불어났다
고향을 버렸던 형들도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들도
무엇에 이끌렸는지 모두 흘러들어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다가 되었다
몇 사람의 제물로 바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는 새벽
무기는 마침내 거꾸러지고
사람들은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박몽구, 「십자가의 꿈 5 - 금남로 탈환의 대낮」 전문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필자는 당시 금남로에서 목격한 광경을 토대로 위의 시를 썼다.

5월 21일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으면서도 시민군을 조직하여 맞서자, 민심의 파도를 거스르지 못한 계엄군은 마침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이때부터 한국 현대사상 보기 드물게 단 닷새간의 해방구가 형성되었다.

첫날 시위에 작은 불씨를 지폈던 나는 삼십 리 떨어진 송정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27일 항쟁이 탱크와 기관총, 불꽃을 튀기며 눈이 머는 섬광을 내뿜는 스턴탄으로 무장한 계엄군에게 짓밟히기까지 현장을 지켰다.

당시 스물다섯의 젊은 시인이었던 나는, 파블로 네루다나 가르시아 로르카처럼, 어려움에 처한 겨레붙이들과 함께하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생각으로 금남로를 지켰다. 

녹두서점에서 다시 만난 제대병 친구 김상집과 함께 전남대에서 버스를 징발하여 가두방송으로 시민군 모집에 나서고,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장갑차를 징발하러 가기도 했다.

투옥 중인 박현채 선생의 동생 박승채, 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임영희 씨 등과 함께 대인시장으로 주먹밥 조달에 나섰고, 시민 세력의 집결지 YWCA에서 벽보 격문을 쓰며 광주를 지켰다.

22일 해방구가 이룩된 다음부터는 도청 앞 분수대에 올라 연극연출가 박효선, 광주일고 후배 김태종, 탈춤반 후배 최인선 씨들과 함께 시민궐기대회 사회를 보며 군부독재 음모를 고발하고 시민군 모집에 나섰다.

이른바 운동권 학생과 재야 인사들이 검거를 피해 숨어버린 상황에서, 이렇듯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광주를 유린하지 못하도록 지킨 것이 5·18을 전 시민적 민중항쟁으로 만든 첫 번째 요인이었다.

오늘날 5·18민주묘역에 묻힌 이들을 살펴보더라도 항쟁 당시 부상당한 이들을 살리고자 자발적으로 헌혈을 하고 나오다 계엄군의 조준 사격으로 절명한 당시 춘태여상 재학생 박금희 양 등 평범한 시민들이 대다수이다.

이만 보더라도 항쟁의 주역을 다름 아닌 일상을 묵묵히 꾸려가던 시민들임을 알 수 있다.
 

■기층 민중의 무장봉기로 해방구를 열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5월 20일 밤이 지나도록 시민들은 계엄군을 도청은 물론 광주 일원에서 퇴치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엄군은 장갑차와 무장 헬리콥터 등 우세한 장비로 방어전을 쳤고, 광주공원 등지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물러서는 시민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밤새 도청으로 향하는 여러 길목에서 계엄군을 밀어붙였다.

시위대는 땅거미가 밀려들어 오는데도 흩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져 갔다.

밤 9시 20분경,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시위대의 광주고속버스 차량에 경찰 4명이 깔려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밤 10시 무렵에는 MBC 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는 광주역 근처 KBS 방송국도 불탔다.

엄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임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 일방적으로 폭도로 모는 등 광주 상황을 두고 연일 불공정한 보도를 일삼기 때문이었다.

새벽 1시경에는, 광주세무서도 불길에 휩싸였다.

‘군대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데, 군인들이 휴전선은 안 지키고, 국민을 죽이러 왔다’며 시민들이 격분한 결과였다.

이렇게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공방전이 이어지다, 5월 21일 오후 들어 계엄군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든 일이 있었다.

그날 오후 2시경 계엄군의 총격에 맞서서, 시민들이 화순 탄광 무기고 등에서 징발해온 M1과 카빈 소총을 한국은행 광주지점 등 고층건물에서 응사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
ⓒ광주인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포함한 지역 주민들을 무차별 사격하여 억울한 죽음들이 양산되는 걸 본 화순과 송정리, 나주 등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역 건달들, 부랑인들은 화순 탄광 예비군 대대 등에 영치중인 총기를 징발하여 무장하기로 결의한다.

이들을 가리켜 건달이나 지역 조폭 등으로 멍에를 씌우기 십상이지만, 실은 이들은 처음부터 건달이 되기보다 빈약한 학력, 직업 기회의 박탈 등 사회적 소외에 따라 지역 건달로 편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일용직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지역 부랑인들도 위기를 느낀 나머지 무기를 탈취하여, 자발적으로 시민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또한 구두닦이, 일용 노동자 등 요즈음 말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해방구로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활짝 연 것은 이들 지역 건달, 부랑인 및 스무 살 전후의 의협심 강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발포가 공식화되고 시민들이 무차별 사격에 노출되자 자위 차원에서 금남로 4가 한국은행 등에서 도청을 에워싼 계엄군을 향해 총격으로 응사하여 시민군의 대오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민군이 발포를 시작하자 계엄군은 심상치 않은 민심의 변화를 실감했다.

그리고 저녁 6시 즈음이 되어 몰려오는 땅거미에 숨어서 도청 안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담양 쪽 광주교도소, 화순 너릿재, 송정리로 통하는 화정동 고개 너머로 철수하였다.

민주 시민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무장한 정규군에 맞서 싸워서 승리한 쾌거였다.

이로써 한국 현대사상 전무후무한 닷새간의 민중 해방구가 이루어졌지만, 이는 시민군의 전면적인 승리라기보다는 계엄군의 작전상 철수였다는 분석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설득력을 띠고 있다.

이후 지역 출신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시민군은 젊은 학생들, 노동자들을 대거 흡수하여 해방구를 이루고 27일까지 닷새 동안 민주 세상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광주 일원이 철저히 봉쇄된 가운데서도 시민들끼리 자급자족하면서, 치안 경찰이 부재한 상황에서 도둑 하나 없이 안정된 민중 해방구를 꾸려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5월 22일에서 27일에 이르는 광주해방구가 한국 현대사상 최초로 건설된 것이다.

이렇게 해방구가 건설되었지만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광주인

민심의 이반을 절감한 계엄군은 화순 너릿재, 송정리 방면 화정동 고개, 담양 방면 광주교도소 너머로 일단 후퇴하였지만 이후에도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등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만행을 일삼았고 호시탐탐 재진입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또한 발포 이후 군 제대자 등이 중심이 되어 시민군이 결성되었지만, 시 외곽에서 며칠씩 철야하며 주먹밥으로 견디던 시민군들은 급속하게 지쳐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22일 낮 12시 30분경, 신부·목사·변호사·교수·정치인 등 20여 명으로 ‘5·18 일반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전남대 농대생 김창길 씨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중심이 된 ‘일반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대민 업무를 맡았다.

학생수습위는 장례반, 홍보반, 차량 통제반, 무기 수거반으로 나뉘어 활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수습위가 민중 항쟁을 이어가고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목표를 두기보다 자신들의 안녕을 도모하면서,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하는 등 투항적인 자세로 일관한 데 있었다.

도청 옆 상무관에서는 외곽에서 희생된 시민군과 시민들의 속속 안치되고, 도청 앞마당에서는 수습위가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카빈총 등 무기가 쌓였다.

5월 24일, 항쟁 7일째로 접어들면서 수습대책위원회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날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김창길 위원장의 사회로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
ⓒ광주인

그 자리에서 온건파와 대립하여 항쟁파로 분류되던 김종배, 허규정 등의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채택됐다.

첫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구속된 학생·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피해 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학생수습위는 항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온건파가 한걸음 물러섰다.

일반수습대책위에도 비슷한 변화가 생겼다. 무조건 무기 반납을 주장하던 온건파 대신 재야민주인사 및 천주교 신부들로 교체되었다.

수습대책위 내부가 의견 대립으로 흔들리자 이를 틈타 군의 정보 요원들이 도청에까지 잠입하여 교란 작전을 시도했다.

25일 아침 8시, 도청 내부에서 ‘독침 사건’이 발생했다. 독침사건의 주인공은 보안사가 시민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침투시킨 인물로 후일 밝혀졌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둘러싸고 봉쇄 작전을 펼치는 동안 왜곡 보도를 일삼는 국내 언론과 달리 광주 소식을 본 대로 전세계에 알리는 외신기자들에게는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왔다.
 

광주 해방구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지킨 사람들

ⓒ
ⓒ광주인

이를 지켜보던 뜻있는 인사들은 수습에만 전념할 게 아니라 억울하게 희생된 시민들의 죽음이 신원伸寃되고, 5·18광주민중항쟁이 이 나라의 민주 회복을 달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에는 전남대 운동권 출신으로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신분을 버리고 광천동에서 야학 운동을 하던 윤상원, 전남대 출신으로 전태일 기념사업회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이양현, 학생운동 출신으로 보성기업 창업에 참여하고 있던 정상용, 전남대 복학생 윤강옥, 조선대 운동권 출신 김웅기 씨 등이 해방구가 이룩된 뒤 도청으로 들어가 항쟁 지도부를 이루었다.

나아가 그저 총을 반납하는 데 치중하지 말고 끝까지 항쟁의 대의를 전국으로 확산하여 전두환 신군부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룩해야 된다는 취지하에 수습위를 시민투쟁위원회로 개편하였다.

25일 밤 10시, 온건파와 갈등 끝에 항쟁파 중심으로 ‘항쟁지도부’가 새롭게 탄생했다.

항쟁지도부는 학생수습대책위의 일부 항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무장 투쟁 국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기층 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항쟁지도부는 즉각 무기 회수를 중단시켰다.

온건파의 ‘아무런 조건 없이 총기를 내려놓고 도청을 비워버리자’는 주장과 달리 ‘시민들의 투쟁 역량을 재정비하여 계엄군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생각이었다.

각자 역할을 새롭게 분담하고, 시민 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26일 오전, 항쟁지도부는 시민군의 무장 전열부터 재정비했다.

기존 기동순찰대를 해체하고 기동타격대로 새롭게 편성했다.

만약 계엄군이 공격해 오면 도청 지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다이너마이트로 대항하겠다며 계엄당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학생운동가 출신들을 비롯한 운동권 인사들의 참여로 수습위원회에서 투쟁위원회로 바꾸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항쟁지도부 대변인 윤상원 씨를 중심으로 외신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갖는 등 광주를 세계화하는 데도 한 걸음 내딛었다.

그렇지만 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와 대포를 앞세운 우세한 전력으로 도청에 진입하여 윤상원 씨 등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5·18민중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
ⓒ광주인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5·18광주민중항쟁은 언뜻 무력으로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이후 기층 민중들을 자각시켜 민주적인 노동운동이 일어나는 발판이 되었고, 1987년 6·10 시민항쟁으로 이어져 이 나라에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광주 해방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가운데서 윤상원 항쟁위원회 대변인 등 운동권 인사들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참여한 것이 5·18광주민중항쟁을 단순한 시민 저항 운동을 넘어,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한국 민주화의 거점이자 민중 항쟁의 본적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수습위원회가 주도하여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고 투항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상황으로 끝났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군부 독재의 사슬에 묶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상원, 윤강옥, 정상용, 이양현, 김영철, 박효선 등 민주 인사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고 계엄군의 비인간적 진압에 맞서 싸운 덕분에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질기고 활발한 생명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18 이후 변화된 한국사회, 퇴행하는 문학

5·18광주민중항쟁 43주년을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살펴보면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가장 아쉬운 것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거대한 민중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앞날을 내다보며 이끌어갈 지도부가 처음부터 부재하였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희생이 많이 나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속칭 ‘화려한 휴가’를 명령받은 계엄군과 맞설 만한 지도부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
ⓒ광주인

5월 15일까지 학생운동 지도부를 이끌던 박관현 등의 학생 지도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앞두고 계엄군에 예비검속되거나, 검속을 피했다 하더라도 검거를 피하여 도피하였다.

그나마 5월 18일에는 시내에 남아 있던 일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계엄군에 맞서서 저항하는 등 리더 역할을 일부 하였다.

하지만 5월 18일 당일 계엄군이 비무장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무력 진압에 나서면서, 다음날부터는 운동권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 계층이 일제히 사라졌다.

학생운동 출신 등 세계관이 확고한 이들로 지도부가 구성된 것은 윤상원 씨 등이 항쟁지도부를 자임한 25일 이후였다.

문학인들의 경우에도 5·18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항쟁 직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하여 널리 알려진 시인 김준태, 항쟁 서두를 여는 데 참여한 후 위기에 처한 시민들을 모른 체할 수 없어 항쟁 기간 내내 주먹밥 만들기, 시민군 모집 및 분수대 일원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 사회자 등으로 지낸 박몽구, 광주시민수습위원회에 참여한 소설가 송기숙 등이 있지만 널리 문명을 날린 이들의 면면은 항쟁 기간 내내 찾을 수 없었다.

계엄군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거짓 선무방송을 하던 광주 MBC가 불타던 5월 20일 밤 김준태 시인을 만나 도청을 향해 함께 나아가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는 이 자리를 꼭 지켜야 하네! 우리가 본 것을 후대에 널리 알리세!” 하는 단호한 다짐과 함께, 계엄군이 탱크로 밀고 들어오면 잠시 물러났다가 이내 다시 도청을 향해 시민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나아갔다.

나는 그때 시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
ⓒ광주인

이 같은 민중혁명의 한가운데 선 덕분에 김준태 시인은 5·18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직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절창의 시를 분연히 써서 계엄 당국의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전남매일》에 발표할 수 있었다.

시인이란 모름지기 정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김준태는 스페인 혁명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에 비견되는 시인이다.

시인 김준태는 필자와 5월 21일 계엄군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밤 광주 MBC 부근에서 만나 함께 도청으로 가는 시위대열에 선 적이 있다.

역사상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되겠지만 5·18과 같은 일이 재연된다면 나는 그 자리를 물러서지 않고 지킬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모름지기 민중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시인, 소설가라면 5·18민중항쟁을 돌아보고 그 깊은 슬픔을 함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동자, 사회 저변층 등 시민군 출신들 가운데에는 이후 일자리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사회적 경제적 소외 등이 원인이 되어 160여 명 이상이 자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최근 시민군 출신들이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등 공법단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저변에는 우리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왔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점 등이 큰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5·18광주민중항쟁이 우리 사회에 던진 테제 중 으뜸가는 것이 있다면,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이 중심이 되지 않고는 사회 변혁은 어렵다는 것이다.

5월 27일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신군부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변혁 의지를 불태운 이들은 아시아자동차 노조 소속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부랑인 등 기층 민중이 대다수였다.

ⓒ
ⓒ광주인
ⓒ
ⓒ광주인

이들이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대동세상을 여는 데 온몸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 1990년대 초까지 뜻있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 현장에 투신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단단한 기층 민중층을 형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었다.

실제로 전국교사협의회가 결성되어 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을 타파하고 교원들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한 전교조 조직운동을 벌여 나갔다.

노동계에서도 변혁 운동을 제대로 벌이고 노동자 권익 향상을 위해서는 어용 노조를 타파하고 실천적인 노조 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게 일면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이 뒷날 민주노총으로 발전되었다.

문인 사회에서도 보다 실천적으로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하여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고, 사회 제반 세력들과 연대하여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채광석 시인이 중심이 되어 1980년 이후 활동 정지 상태에 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젊은 문인들 중심으로 1984년에 재출발시킨 것도 그 일환이다.

당시 총무간사 채광석은 5·18 당시 기층 민중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절감하고 현장 노동자인 박노해를 시인으로 등단시키는 등 민족·민중문학권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그는 1987년 서른아홉 나이에 요절하는 날까지도 연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교사협의회, 민노총 준비위 등 제반 사회운동 모임에 연일 참여하여 문학의 설 자리를 넓혔다.

그가 재임 중인 때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연거푸 구속 문인 석방 문학의 밤을 개최하고, 5·18 기념일에는 당시 증언을 듣고 시 추모시를 낭송하는 집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
ⓒ광주인

하지만 채광석이 아까운 나이에 절명한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백낙청, 신경림, 이호철 등 선배 문인들 주도하에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뀌었고 다시는 5·18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하는 모임을 개최하지 않았다.

또 아직까지도 상당수의 원로 선배 문인들 가운데에는 5·18을 주제로 한 시 한 편 쓰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5·18광주민중항쟁이 기충민중들의 사회 변혁 의지를 반영한 민주 회복운동인데도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외양의 변신과는 달리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

즉, 회를 대표하는 이사장이 회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특정 그룹이 밀실에서 미는 사람으로 수십년 간 낙점되고 있다.

또한 30년이 훨씬 넘는 회원들의 직선제 요구 끝에 2019년부터 가까스로 사무총장 직선제로 바뀌어 2대째 이어지고 있지만, 정관상 사무총장의 입지가 모호하여 회원들의 총의로 선출되지 않은 이사장 독주체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는 같은 시기에 민주화 운동 조직으로 출발한 민노총, 전교조 등과는 매우 동떨어진 비민주적 조직으로 온존하고 있어서 한국작가회의 내외의 따가운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런 가운데 5·18기념재단 등 5·18광주민중항쟁 정신의 계승과 확장을 내걸고 창립한 단체들이 설립 정신과 어긋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도 크게 일고 있다.

ⓒ
ⓒ광주인

항쟁의 주역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면서, 몇몇 인사들이 수십 년 동안 자리를 독과점하다시피 하면서 개인의 사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이 타파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5·18 관련 몇몇 인사들이 국회로 진출하여 5·18 정신의 계승과 확장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설립된 5·18기념재단의 경우에도 항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장악한 채 운영되다가 심지어 5·18진상규명위원회마저 대부분 항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장악하는 등, 5·18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 일단의 인물들이 장악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목숨을 바쳐 산화한 5·18 영령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의자를 바꿔 앉으면서 수십년 간 보이지 않는 권력을 장악한 이들은 조속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5·18 정신의 문학적 계승과 확산을 제정 취지로 내건 5·18기념재단 주관의 ‘5·18문학상’의 경우에도 광주민중항쟁 현장을 생생하게 담고 진상 규명 의지를 생생하게 담았을 뿐더러 문학적 형상화가 잘된 것으로 인정받은 작품들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학상의 시행 초기부터 철저히 외면하여 문단 내외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광주인
ⓒ광주인

또한 그동안 민족·민중문학의 선두주자로 널리 알려진 문학인들이 막상 온 시민들이 나서서 신군부의 폭압에 맞서서 목숨을 내놓고 항쟁을 벌이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하고 고통받는 민중과 철저히 등을 돌려온 데 대해 문학인들이 단 한번도 반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은 일도 차제에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광주 현지의 문학인들뿐 아니라 이후 5·18 정신을 문학적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에 대하여도 자유실천문학위원회 시절부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일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안타까운 현실을 넘어 5·18 진상 규명이며, 희생자 등 참여자들을 외면한 채 매년 일반 문학상과 별다른 차이 없이 운영되고 있는 5·18문학상은 차제에 분명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5·18문학제의 경우에도 전국의 문인들이 두루 참여하는 자리인만큼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에 앞서, 상처가 더욱 깊어져가는 당사자들을 초대하여 생생한 증언을 듣는 등 진상을 제대로 알리는 작업부터 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에 유념해 주었으면 한다.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5·18이 갈수록 잊혀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
ⓒ광주인
ⓒ
ⓒ광주인

흔히 아픈 상처를 안은 역사적 사건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귀한 목숨을 아깝지 않고 내놓은 채 막강한 무력의 군부 세력을 물리쳐서 민중 해방구를 이루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살았던 대동세상은 결코 쉽고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넘어, 죽음을 넘어 하나 된 대동세상을 만나고 싶다면 5·18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민중·민족과 함께하는 문학인이라면 오늘 다시 5·18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그것이 남긴 깊은 상처를 함께하면서, 우리 사회가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는 데 솔선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박몽구 시인, 문학평론가. 5·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원. 《5월, 눌린 기억을 펴다》 등의 시집을 갖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관련기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