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실련 지역순회 토론회-비례성 강화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발제자- 하상응(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실련 정치개혁위원회 위원장)

아래 글은 경실련과 광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지방자치연구소 주관으로 지난 3월 17일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245 광주NGO센터 시민마루에서 열린 선거제도 개혁 지역순회 토론회에서 발표된 발제문 전문입니다. /편집자 주


발제문 [전문]

지역대표성 관점에서 본 선거제도 개혁

-하상응(서강대학교, 경실련 정치개혁위원회 위원장)
 

1. 들어가며

-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 관련한 논의는 다른 정치 개혁 논의와 맞물려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시 하는 원칙과 방향성에 대한 합의가 없이 논의를 진행하면 혼란만 가중되거나,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선거제도 개혁만 된다면 정치권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선거제도 개혁을 이뤄 다당제가 실현된다고 해도 양극화가 완화되고 협치가 가능한 상황이 연출될지는 알 수 없다.

선거제도 개혁 말고도, 정당법 개정, 공천제도 개선 등과 같이 정치권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들은 많다.

이러한 개혁 방안들 간에는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하는데, 선거제도 개혁이 반드시 최우선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2] 선거제도 개혁의 논점을 흐리는 거대 담론도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선거제도 개혁을 정부 형태 개헌과 엮어서 논의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선거제도 개편이 개헌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거대 담론은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달성될 가능성이 희박한 내용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기후 위기에 보다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선거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믿음에 기반한 것이지 경험적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3] 특정 선거제도의 장점이 현실에서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혹은 예상되는 (혹은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4년 전 선거제도 개혁 논의 과정에서 위성정당 창립 가능성은 정치학자들과 일부 정치인에 의해 분명히, 명확하게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 왜 이 지적이 무시되었는가?)
 

2.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기본 원리

- 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는 선거로 뽑힌 대표가 일반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여 법과 정책을 만드는 제도이다.

- 교과서에 따르면 대표(국회의원)에게는 조응성(responsiveness)과 책임성(responsibility)이 요구된다. 조응성은 대표가 자신을 뽑아준 (지역구) 유권자의 의견을 수용하여 법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책임성은 입법부의 구성원으로서 국회의원이 국가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법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당연히 조응성과 책임성은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 한국의 맥락에서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1) 비례성(proportionality), (2) 책무성(accountability), (3) 대표성(representation)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비례성은 유권자들이 후보 혹은 정당을 선택한 비율만큼 국회의원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정당이 전국 단위에서 총 20%에 달하는 유권자들의 표를 확보했다면, 그 정당은 전체 국회 의석 중 2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비례성 원리에 충실한 선거제도가 비례대표제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채택한 소선거구제에서는 비례성 원칙이 깨지기 쉽다.

소선거구제에서는 각 지역구에서 1등을 차지한 후보만 국회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100개의 지역구가 있는데, 특정 정당의 후보들이 모두 자신의 지역구에서 40%의 득표율로 2등을 했다면, 그 정당은 전국 단위에서 총 40%의 유권자의 표심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이 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버려진 40%의 표를 ‘사표’라고 부른다.)

[2] 책무성 원칙은 선출직 공무원이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오히려 소선거구 제도에서 잘 지켜진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을 보고 투표하고, 선출된 후보의 성과를 평가하여 다음 선거에서 재차 지지할지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구 국회의원은 유권자의 민심을 확보하기 위해 민의의 대리자로서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유권자가 특정 후보 대신 정당을 선택하게 하여 비례성을 확보하는 비례대표제에서는 책무성 원칙이 어느 정도 훼손되기 마련이다. (지난 2020년 선거 당시 위성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 2번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유권자들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3] 대표성은 국회의 구성이 유권 집단의 구성과 유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국민의 50%가 여성이라면 국회의원의 50%도 여성, 국민의 20%가 특정 직업에 종사한다면 그 직업 출신 국회의원의 비율도 20%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표성 확보를 위해 특정 인구집단 출신 의원을 일정 수 보장하는 할당제(quota system)를 법제화 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한국의 연령 기준 20~30대 국회의원의 수가 얼마나 될까?)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근 선거제도 개정 논의에서 대표성 개념은 ‘지역 대표성’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 같다.

- 문제는 비례성, 책무성, 대표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선거제도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비례성 원칙에만 초점을 맞추어 사표를 최소화하는 것을 우선시하면 비례대표제가 답일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국회의원과 일반 유권자 간의 관계를 유리될 가능성이 높다.

책무성 원칙에만 방점을 찍어 지역구 소선거제만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면 사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대표성에만 집중하여 직능/인구집단별 의석 할당제를 선거제도의 핵심 의제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 이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러 원칙들을 절충하는 선거제도가 활용된다.

(1)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병립형 제도에서는 일부 의석은 지역 소선거구에서 직접 후보를 선출하여 채우고, 나머지 의석은 정당 투표율에 따라 배분하여 비례성을 보완한다.

(2) 비례대표제 하에서도 유권자가 정당만 선택할 수 있는 폐쇄형 명부제 대신, 지지 정당에서 내세운 후보들을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개방형 명부제에서는 책무성 보완이 가능하다.

(3) 지난 제21대 총선에 적용된 연동형 제도 역시 원래 지역구 대표를 뽑기 위해 던진 표의 비율에 준해 의석 배분을 조정하여, 책무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비례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 2023년 3월까지 국회에서 논의된 다양한 선거제도 개혁 방안들도 여러 원칙들을 절충한 것들이다.
(아래 표 참조;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우진 교수님 자료)

- 정개특위는 현재 4가지 정도의 안으로 논의의 범위를 압축한 상황이다.

- 정개특위 워크숍 성과 브리핑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선거제도 개혁 논의의 방향: 공론조사의 필요성

- 여러 원칙들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선거제도는 복잡해진다.

여러 선거제도들의 장단점을 따지기 위해 복잡한 수식이 동원되기도 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시뮬레이션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을 일반 유권자가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선거제도 개편 논의가 진행되면 될수록 일반 유권자들이 소외되는 경향이 생긴다.

- 국회의원 개인은 재선이라는 목표 때문에 복잡한 선거제도의 내용을 꼼꼼히 따진다.

정당은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다양한 선거제도의 이모저모를 철저하게 검토한다.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론적 차원에서 여러 선거제도의 장단점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선거제도 개편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반 유권자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유권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선거제도가 무슨 소용인가?

유권자에게 여러 선거제도의 장단점을 잘 이해시킨 후 선호를 묻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 아마도 가장 우려해야 하는 지점은 유권자들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는 선거제도 개혁이 “그들만의 논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복입후보제는 실질적으로 현역 정치인의 자리를 더 공고히 하는 제도가 되지 않을까?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하면 양당제가 더 고착화되는 것 아닌가? 비례성, 대표성 모두 중요한 것 알겠는데, 책무성은 고려 대상이 아닌가?)

- 최악의 경우 (1) 지방 현역의원 의석은 소선거구제로 유지해주고, (2) 도시지역 현역의원 의석은 중대선거구제로 유지해주고, (3) 군소정당과 공천탈락 의원 의석은 비례의석 늘려서 보전해주는 선거제도가 될 수 있다. 이런 고려는 해 보았는가? 이것을 유권자에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 있는가?

-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여론조사를 통해 선거제도 개혁안에 대한 선호도를 묻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일반 유권자들은 다양한 선거제도의 장단점에 대해 충분한 알고 판단할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현안에 대해 즉흥적으로 제공한 찬반 의견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숙의 참여자

결정 양식

여론의 성격

편의 표본

(convenience sample)

무작위 표본

(random sample)

전체 유권자

정제되지 않은 여론 (raw public opinion)

일부 여론조사

대부분의 여론조사

국민투표

(referendum)

정제된 여론 (refined public opinion)

배심원

(jury system)

공론조사 (deliberative polls)

숙의의 날

(“Deliberative Day”)

 

-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일반 유권자의 의견을 알기 위해서는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이미 ‘신고리 5·6호기 건설’ 등과 같은 현안 해결을 위해 수행해 본 경험이 있다.) 전문가(학자 및 정치인)의 논의를 거쳐 몇 가지 선거제도 개혁안을 선정한 후, 그 내용을 무작위로 선발한 일반 유권자들에게 (1) 교육을 시키고, (2) 숙의를 하게 한 후, (3) 선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공론조사의 기본 운영 원칙이다.

아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유권자의 ‘정제된 의견(refined opinion)’이다.

4. 정리

- 4년 전부터 논의된 선거제도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비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논의가 모여야 자연스럽다.

4년 전에 마련된 선거제도가 위성정당 등의 문제로 원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시 논의 자체가 의미 없었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축적된 논의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개혁이 진행되어야 국민들에게도 개혁 의지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4년 전에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비례성 향상과는 무관하거나 관계가 약한 제도를 지금 새롭게 고려하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역 대표성 강화와 비례성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가 양당제가 강화되면 그것이 정말 지역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 2024년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후에도 선거제도 개혁 논의는 지속될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일반 유권자의 ‘정제된 의견’을 공론조사를 통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거제도와 밀접한 연관 관계에 있는 정당법과 공천제도에 대한 풍부한 논의 역시 병행해야 할 것이다.

- 만약 지방/지역 대표성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정당법 개정을 통한 지역정당의 설립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선거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지역 대표성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 선거제도 개혁은 비례성 강화, 정당법 개정을 통한 지역 대표성 강화. 이런 “투트랙 전략”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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