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2023)가 관객 10만을 돌파 했다.

1000만 관객이 흥행의 지표가 된 요즘에 10만이라는 숫자는 다소 외소해 보이지만 독립영화 업계에서 10만은 상업 영화계의 1,000만 못지않은 괄목할 만한 성과다.

작년 독립영화 최고 흥행작인 <그대가 조국>(이승준)이 33만을 기록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다음 소희>는 올해 흥행한 독립영화로 남을 것 같다.

하지만 <다음 소희>의 인기가 그리 기쁘지만은 않다.

독립영화의 흥행이라면 영화광으로서 기뻐할 일이지만, 극장 밖을 나선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씁쓸한 뒷맛이 가시질 않는다.

영화의 주제가 주제인지라 더욱 그렇다. 

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이미지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이미지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다음 소희>는 노동현장의 참사를 다룬 영화다. 그것도 청소년 노동의 착취를. 콜센터 실습생으로 파견된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과, 은폐된 죽음의 원인을 뒤쫓는 한 형사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주인공 소녀 소희(김시은)가 노동착취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게된 경위를 낱낱이 보여주고, 자살과 타살의 경계에 있는 이러한 죽음에 의문을 갖은 형사 유진(배두나)는 죽음의 내막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사건의 전말을 가르쳐주고 아슬아슬하게 놓치는 아쉬움과 진실을 밝혀내는 쾌감을 자아내는 영화의 전개방식은 여느 범죄 수사물 영화에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석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다음 소희>에서는 서스펜스와 쾌감을 느낄 수 없다.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소희와 유진이 아니라 기계적인 사회 체계다.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는 유진의 수사 과정은 사회체계가 작은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 철통같은 견고함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성과주의라는 체계의 소프트웨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스스로 톱니바퀴가 되도록 종용한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모든 가치들은 실적이라는 잣대로 수치화 되고 평가의 기준이 된다.

소희가 흔적이 남아있는 학교, 콜센터, 집마저 이러한 냉혹한 체계의 일부로 작동한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취업률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콜센터는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아이들의 노동과 감정을 갈아 넣는다.
 

영화
영화 "다음 소희" 스틸 이미지ⓒ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갈려나가는 체계의 톱니바퀴의 틈새에서 유진은 진실을 찾아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소희의 죽음에서 출발해서 시스템의 금자탑 가장 위까지 거슬러 오르는 과정은 죽음에 은폐된 사실을 폭로하는 시원함은 없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답답한 사회 구조와 무감정한 멘탈리티를 재확인함으로써 다시금 현실을 감각하는 지난한 과정만이 있다.   

<다음 소희>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견고한 사회체계가 죽음의 공백마저도 체계의 일부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라진 사람의 자리는 너무나 쉽게 메꿔진다.

어린 소녀들을 착취하는 회사를 고발한 과장의 죽음은 다른 과장으로 대체하고 시스템은 다시 매끄럽게 작동한다.

체계의 톱니바퀴를 빠져나온 사람을 불량품으로 매도하는 성과주의의 체계는 죽음을 예외상태로 만듦으로써 체계의 견고함이 유지된다.

이러한 체계의 폭력에서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소희의 죽음에는 모두가 책임이 있지만 책임의 주체는 없다.

소희를 콜센터에 파견하게 만든 교육청에서 유진이 확인하는 것은 책임의 공백이 체계의 일부라는 사실 뿐이다.
 

영화
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이미지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영화를 보고 난 후 각인되는 것은 비정한 사회체계의 견고함이다.

모두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지만 낭떠러지를 향해 무리지어 달려가는 쥐떼들처럼 모두가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가고 있다.

모두가 점차로 소진되는 사회 시스템이 정지할 수 있을까?

절망과 피로에 지친 아이들의 얼굴, 다음의 소희가 될지 모르는 아이들의 서글픈 얼굴만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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