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박사, "세계에서 제일 번영하는 금수강산을 건설할 저력이 있다"

최근 『서양철학의 역설』(도서출판 바람꽃)을 출간한 김성수 박사(88)가 동학민족통일회 초청으로 16일 오후 3시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독일통일과 한반도통일의 전망' 제하의 강연을 했다. 강연문을 싣는다. <편집자>
 

독일통일과 한반도통일의 전망
 

1. 독일통일
 

독일이 1991년 통일되기 이전에 서독(BRD)의 인구는 약 5천300만명이었으며, 경제력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2위 또는 3위, 세계에서 미군이 20만 명 이상으로 제일 많이 주둔한 나라였다.

미군 이외도 2차대전 승전국들인 영국, 프랑스, 벨기에 군인들이 대대 또는 연대 단위로 주둔해 있었다.

동독(DDR)의 인구는 약 1천600만, 유럽 사회주의국가 중에서 국력에서 소련 다음의 위치에 있었다.

동독은 서독과 마찬가지로 동서냉전 시대의 최전선에 위치하였으며, 소련군대가 20만명 가량 배치되어 있었다.

동서독 간에는 70년대 초반부터 제한적이지만 인적인 왕래, 우편 전화 통신, 경제문화 체육 교류가 가능했다.

동독의 수도이면서 동독의 중심부에 있는 베를린은 동서 베를린으로 분할되어 동독 쪽에서 철조망을 구축했으며, 그 외 지역은 수백킬로미터의 철조망으로 국경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위적인 분단이 거의 45년간 지속하였어도 국경지대에서 군사적 충돌은 거의 없었다.

다만 베를린장벽에서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에 대한 총격으로 수십 명이 살상되는 사건 등이 알려졌다.

동서독은 분단 초기부터 영구분단 또는 두 개의 국가건설로 기성화되었다.

그 첫째 이유는 독일이 통일되면 강대국으로 될 독일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두려움으로 인한 강력한 반대, 두 번째는 통일을 지향한 동서독의 분쟁은 곧 세계 3차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 셋째는 독일과 오지리의 분리국가의 역사적 사례 등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동서독 어디에서도 통일운동이나 통일운동 단체가 구성되어 활동한 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통일이론이나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역린으로 국내에서는 빌리 브란트-에곤 바의 1969년 ‘동방정책’의 ‘접촉을 통한 변화’를 독일통일 준비론으로 남한에서 잘 못 이해한 견해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동방정책은 동구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화해정책으로 동서진영 간에 상호 개방하고 소통하여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것이었다.

빌리 브란트는 반 히틀러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한때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를 이해한 그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진영 간의 평화적 경쟁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동방정책은 동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독의 ‘할슈타인 독트린’을 파탄시키고 1972년에는 동서독 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1민족 2국가론이 힘을 얻게 했으며 1973년에는 동서독이 동시 유엔가입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1민족 2국가론은 1980년대 중반 서독의 콜 수상과 동독의 호네커 수상의 상호방문을 통해 동독과 서독이 두 개의 독자적인 국가임을 선포하는 외교적 표현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과 수년 뒤에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이라는 ‘통일 기적’이 극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현상은 사회주의진영의 맹주였던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행한 정치적 배신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자기의 형제국가인 동독을 흡수통일로 넘겨주면서 소련의 자본주의화, 즉 자기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와 글라스노스트(투명) 정책을 확인시켜주자는 의도의 일환이었다.

그는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서독을 방문하여 자기의 정치 노선을 설명하고, 귀국하는 길에 동독의 호네커를 만났다.

그는 호네커의 반사회주의 세력의 준동을 제압하겠다는 의사를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제압을 시도하면 곧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대로 제압하겠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의 배신을 보고 사회주의 유지를 위한 희망을 접고 해외 망명길을 택했으며, 서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흡수통일을 성취하게 되었다.

1991년 법률적인 통일 이후, 서독은 동독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자본주의 시장경제화하기 위해 일종의 척식회사를 창설했다.

동독의 8000개 이상의 생산공장은 수 개의 예외만 두고 거의 전부를 폐쇄해버렸다.

생산공장 이외의 경제적 사회적 인프라는 서독에 전적으로 예속시켰다.

흡수통일은 일종의 동독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다.

동독 시민은 2등 국민 취급을 감당해야 했으며, 임금, 연금 등 모든 생활 수준은 서독지역의 100%에 대비해 80% 정도였다.

통일된 지 40여 년 지난 현재에도 그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통일 이후 대부분의 동독 시민들은 한때 통일에 대한 환희와 함께 기대가 컸었다.

오늘날에는 동독 시민 중에 옛 동독 시절을 그리워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주택, 교육, 실업자, 사회적 안전문제와 관련해서다.

동독지역에서 사회주의 시절 집권당(SED)의 후예인 좌파 당의 약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일된 독일은 이전 사회주의국가였던 인접 국가들, 예를 들면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을 경제적으로 거의 예속화하여 많은 이득을 획득하고 있다.

그 마지막 예가 우크라이나라 할 수 있다.

이들 나라에 가보면 독일에 대한 위상이 마치 60년대 70년대 남한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선망과 비슷하다.

현재 통일 독일은 뚜렷하게 두 가지 측면에서 역경을 잉태하고 있다.

첫째는 적극적인 우크라이나 개입의 부정적 결과다.

독일통일이 준비되지 않은 흡수통일을 하다 보니 대외정책에서 과거 서독 시절의 미국예속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통일되었음에도 미국의 대러시아 압박정책에 편승하면서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고자 한다.

만약 서독이 동독의 사회주의적 국가운영의 긍정적인 경험과 서독의 자본주의적 국가운영의 긍정적인 경험을 승화시켜 새로운 정치이론을 창출했다면 세계의 정치 흐름을 새롭게 진작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 독일은 역사적 기회를 놓치고 대외적으로 경제적 수탈을 통해 자기만 잘살아 보겠다는 소인배적 타성에 빠지고 있다.

그 예가 우크라이나를 친서방국가로 만들어 러시아를 압박하고자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편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이재민의 발생, 국토의 초토화로 전변되고, 미국과 나토 진영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둘째는 정치세력판도의 극적인 변화다. 
 

통일 독일에서도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중동지역, 아프리카, 우크라이나 등 분쟁지역의 수백만 명의 피난민을 받아들여 채우고 있다.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다.

이 피난민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유럽 나라들에서 정치풍토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요인으로 되고 말았다.

피난민을 배척하면서 유럽연합을 해체하자는 대안 정치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독일의 대안 정치세력은 아직 20% 정도의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정권을 장악했으며, 프랑스, 오지리,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서는 전통적인 정권정치세력의 코밑에서 도전하는 형편이다.

이 대안 정치세력은 멀지 않아 유럽연합을 파탄시킬 위험성이 있으며, 독일은 물론 유럽 및 세계적 정치 판도를 뒤흔들 가능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한반도통일 전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일은 동독과 소련과의 위계적 관계 속에서 준비 없는 통일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은 한국과 미국과의 예속적인 한미동맹 관계로 분단의 장기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통일 전망과 관련하여 우선 독일 교포사회에서 통일운동의 개관, 남북정상회담의 의의, 통일운동의 주체, 통일운동의 정체, 낙관적인 통일 세상 등의 문제를 정리해 본다.
 

2.1 독일 교포사회의 통일운동
 

독일 교포사회는 60년대 중반 이전에는 천명 이하의 유학생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기간 ‘손님 노동자’(가스트 알바이터) 신분으로 독일에 정착하기 시작한 광부와 간호사(각각 약 만 명)는 독일 교포사회를 갑자기 확장시켰다.

80년대부터는 한독간 경제교류의 활성화로 교포가 늘어나면서 3만 5천 명에서 4만 명의 교포사회가 형성되었다.

독일 내 일본인 사회와 비슷한 크기이다.

독일 교포사회에서 1974년부터 조직적인 민주화와 통일운동이 시작되었다.

1973년 말에서 1974년 초 맨 처음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가 발족했으며, 이를 주축으로 노동자연맹(노연), 코리아코미티, 재독여성 모임 등이 반독재민주화운동과 인권보장 운동을 진행했다.

이 기간 정치적 활동과 관련한 가장 큰 정략 문제의 주제는 선민주통일론과 선통일민주화론이었다.

1980년 전두환 군부의 정권장악 이후는 선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 일부는 통일운동에 현재까지도 매진하고 있다.

선민주화를 주장했던 분들 일부는 80년대에 당국의 조사를 받는 조건에서도 귀국했으며, 일부는 독일에 남아 민협, 90년대 이후 재독연대모임으로 오늘날에도 일관하게 민주화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통일운동은 1980년 해외기독자통일위원회(기통회)의 조직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조직체의 활동은 남북해외기독자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세력이 남북화해와 교류를 성사시켜 통일의 물꼬를 트자는 것이었다.

첫째 사업으로 80년대 전반 미주, 유럽의 교포들과 북쪽의 고위인사들과 유럽에서 상봉의 성사였다.

2박 3일씩 비엔나에서 두 번, 헬싱키와 스위스 쥬네브에서 각 한 번씩 상견례와 토론 등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역사적 행적이었다.

안타깝게도 남한의 KNCC에도 초청했으나 정치적 탄압이라는 족쇄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기통회회원들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남북화해 분위기에 맞춰 장기수 선생님들의 귀향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으로 전환했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활동은 독일우체국 직원의 도움으로 독일우체국이 매개하여 독일, 평양, 광주 삼각관계의 통화를 성취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양의 자식들을 독일에 초청하여 광주의 아버지들과의 통화를 성사시켰다.

독일에서 이러한 통일운동이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 남북교류의 선봉이 되었다면 하나의 보람 있는 일로 평가될 것이다.
 

2.2 남북정상회담의 의의

남한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들의 북조선의 김정일, 김정은 정상들과의 회담과 그 결과물로서의 공동성명은 통일운동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근거는 정권 차원에서도 민간의 통일운동에 동참함으로써 통일성취의 강력한 추진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은 남북통일의 핵심적인 문제인 통일운동의 주체, 통일성취의 평화적 방도, 통일실현의 단계적 제도 등에 합의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 합의는 시대적 조건에 부합해서 합리적이며 남북민중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명정대성을 가지고 있다.

남북공동성명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일차적인 문제인 통일의 주체역량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한다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2.3 통일운동의 주체

6.15 남북공동선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10.4선언 “1. 남과 북은 6.15 공동선을 고수하고 적극적으로 구현해 나간다.

남과 북은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이에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4.27 판문점 선언 “1.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며 이미 채택된 남북선언들과 모든 합의를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

남북 해외의 수많은 희생을 동반한 통일운동과 훌륭한 남북공동선언이 있음에도 조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이 통일 주체역량의 약세와 주체와 대립한 외세문제의 미해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2.4 통일운동의 정체

통일운동에서 통일실현의 조건으로 시민운동과 정권의 결합만큼 이상적인 상황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2000년대 20여 년간에 세 번이나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도 통일을 실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체 상태에 빠져있다.

2022년부터 통일의 길은 더욱 험난해지고 있으며,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라는 위험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통일운동 정체의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 통일운동 주체역량을 강화하지 못한 데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보다 결정적인 잘못은 주체역량의 대립적인 이면에 대해서 소홀히 한 것이다.

정상회담을 실현한 3 정권은 모두 외세(미국, 일본)의 압박에서 주체적 자주권을 실현하지 못하고 굴복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정상회담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통일추진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다.

또한, 시민운동세력은 주체역량을 극대화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산된 역량을 주 타격목표에 하나로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운동의 정체를 벗어나는 방도는 먼저 흩어져 있는 역량을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키는 전략 전술을 마련하고 주저 없이 실현하는 것이다.
 

2.5 낙관적인 통일 세상

독일통일은 준비 없이 실현되다 보니 독일 사회의 역사적 도약기회를 놓친 것으로 된다.

통일된 지 30년이 지난 독일은 경제적으로 강하고 우수한 사상 문화적 전통을 가졌음에도 전반적으로 무기력에 빠져 있다.

앞으로 독일 사회의 발전전망에 대해서 낙관적인 독일 시민들은 많지 않다.

독일 사람들은 합리적이며 부지런하며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정신면이나 정서면 그리고 육체적인 면에서도 어느 나라 민족이나 시민보다 못지않게 종합적으로 우수하다.

독일은 아무런 통일운동 없이 통일이 선물처럼 되었으나 우리는 70년 이상 피와 땀을 흘렸음에도 아직도 통일이 지체되고 있다.

그런데도 아니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은 알찬 통일이 되리라.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인내천 사상, 주체사상 등 높은 수준의 철학사상을 창출해 냈다.

남한은 발전된 자본주의사회를 유럽 사람들이 여러 세기 걸린 것을 반세기 만에 성취했다.

북조선은 모든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했지만, 오히려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치고 있다.

이러한 남북이 화해 소통하고 나아가서 통일을 성취하게 되면 세계에서 제일 번영하는 금수강산을 짧은 기간에 건설할 충분한 저력이 보인다.

우선 사상이론적인 차원에서 이미 창출한 사상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적인 사상이론을 태동시킬 것이다.

그리고 남북의 사회경제건설에서 단련된 인재들이 어느 나라보다 질적으로나 수적으로 못지아니하다.

여기에 북조선에는 현대 산업발전에 필수적인 17가지의 희토류, 원유, 마그네사이트 등 여러 가지 지하자원이 양적으로도 풍부하다.

남한에는 이 원료들을 가공할 기술인재들이 넉넉하다.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는 매우 낙관적이다.

2023년 2월 16일

 

김성수 박사

(현) 6·15공동선언실천유럽위원회 자문위원, 독한문화원(Deutsch-Koreanisches Kulturinstitut e.V.) 원장.

저서 『동학 동경대전 독일어 번역과 해설』 (Das Goße Buch des Tonghak von Choe.Che―U, IKO―Verlag, Frankfurt am Main, 1997), 『서양철학의 역설』 (바람꽃,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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