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를 ‘기념비적 장소’ 대신 ‘생동하는 공간’으로 되살려 놓은 뛰어난 재담꾼의 탄생"

그동안 문학에서 ‘남도’라는 공간은 “5‧18민주화운동이나 10‧19여순사건으로 표상되어 온 국가 폭력의 증언 장소, 고귀한 상징성을 보존한 채 화석화되어 가는 장소, 누군가에게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환기하는 장소, 그래서 함부로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워 어떤 자격의 증명을 거쳐야 하는 장소”(김영삼 문학평론가)였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이 장소성은 숭고한 이름으로 전시되거나 기념비적 공간으로 유폐되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어떠한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남도는 더 이상 ‘기념비적 장소’가 아니다

손병현 소설집 '순천 아랫장 주막집 거시기들' 표지그림. ⓒ문학들 제공
손병현 소설집 '순천 아랫장 주막집 거시기들' 표지그림. ⓒ문학들 제공

이번 소설집에서 손병현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숭고한 이름으로 남아 있는 전시장이나 기념비적인 공간의 남도가 아니라 남도라 이름 지어진 경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과 언어에서 보이는 생기와 활력, 그리고 유대와 환대의 정동들이다.

남도인의 삶에는 그 어떤 증명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 환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포용력이 깃들어 있다.

‘거시기’들의 술자리에서 여순사건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학생을 사형 직전에 살려내셔서 양자로 삼아 키우셨”(102쪽)다는 손양원 목사의 일화가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수에 대한 복수 대신 그들을 통해 죽은 자식들의 삶을 대신하게 한 목사의 모습은 절대적 환대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봉만과 같이 ‘못 보던 낯짝’을 ‘문목’의 후배라는 설명만으로 포용하고 안아 준 순천 장터의 지워진 문지방과 ‘거시기들’의 열린 마음과 공명한다.

생각해 보면 ‘순천 아랫장 주막집 거시기들’라는 모임의 이름에는 ○○ 라이온스 클럽, ○○ 향우회, ○○ 전우회 ○○지부, ○○ 종친회 등과 같은 명칭에서 느껴지는 지역 권력의 냄새나 그 주변부를 둘러싼 감투 싸움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어떤 것도, 어떤 사건도 거시기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이 ‘거시기’라는 말은 지시 대상의 불분명함을 대신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 ‘거시기’는 수많은 복합 감정들이 응축되고 뭉쳐진 언어화가 불가능한 정동들의 이름이며, 명함이나 직함에 얽힌 사회·경제적 위계가 지워진 꼭대기 아래 사람들에 대한 총칭이며, 합리성이나 효율성으로 일컬어지는 경쟁 논리가 포착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관계성의 표현이다.(‘거시기’는 사투리가 아니다.) 굳이 이 ‘거시기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작가의 전작에 기대어), ‘형제들(brother)’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뛰어난 재담꾼의 탄생

역설적이게도 손병현 작가는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동문다리 브라더스』와 소설집 『쓸 만한 놈이 나타났다』를 펴낸 바 있다.

이번 소설집은 ‘오월문학’에 대한 작업을 꾸준하게 이어 오던 손병현 작가의 새로운 변신이라면 변신이라고 할 만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그 입담과 뚝심은 그대로인 채 말이다.

타자를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작가는 ‘가난’이라는 장치를 소설에 부착한다.
 

일찍이 그가 타워팰리스 고시원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내 곁에 유령』과 젊은이들이 곤혹스럽게 직면한 현실들을 그려 낸 소설집 『해 뜨는 풍경』에서 익히 사용했던 장치이며, 우리들에게도 결코 낯선 단어가 아니다.

가난은 익히 많은 현대 작가들의 제재였다. 전통문화체험관의 구박덩어리 황 국장(「갑숙 씨는 괴로워」)이나 서울살이의 매정함과 건조한 인간관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낙오자, 패배자로 표현되는 인간의 군상들(「포커페이스」) 또한 낯설지 않다.

환대 이전에는 당연히 쓰라린 패배와 낙오의 경험이 공유되기 때문이다. 적자생존이라 할 수 있는 도시 정글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승리가 아니라 다음의 도전을 끝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여기에서 이야기가 그쳤다면 손병현의 소설은 전작의 서사와 공명하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손병현의 소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전진하여, 새로운 장소성과 언어를 찾아낸다.
 

손병현 소설가. ⓒ문학들 제공
손병현 소설가. ⓒ문학들 제공

그곳은 “서울 중심의 공화국에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던 이들이 뒤에 남겨 둔 그 장소가 버려지고 잊힌 장소가 아니라, 들여다보면 그곳이 바로 생명력이 넘치는 풍요와 삶의 활기가 돋는 환대의 장소”다.

세계의 패배자들이여, 남도로 오라고 유혹하는 이 소설집을 통해 남도는 더 이상 ‘기념비적 장소’로 희석화되지 않고 ‘생동하는 삶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독자는 한 뛰어난 재담꾼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손병현 작가는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199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해 뜨는 풍경』, 『쓸 만한 놈이 나타났다』, 장편소설 『내 곁에 유령』, 『동문다리 브라더스』 등을 펴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