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간 오직 약자와 빈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역한 깊은 영성을 지닌 사제"

김규돈 신부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 때문에 글을 올린지 10시간만에 청문의 절차도 없이 주교님에게 직권면직을 당했다.

걷잡을 수 없이 사건이 커져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가슴에 바위를 얹어놓은 듯 무겁고 답답하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제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분에게 사제직을 박탈하는 직권면직은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조치라 할 수 있다.

나는 같은 교구에 속해 있는 동료사제로서 그에 대해 솔직히 깊이 알지 못했다. 

이런 사건이 터지고 나니 비로소 그의 진면목이 그와 가까운 분들에 의해 전해진다. 

김규돈 성공회 신부.
김규돈 성공회 신부.

그는 원래 천주교 한국외방선교회 창립멤버로서 수사신부였다.

1976년도에 소신학교에 들어가서 카톨릭 대학을 나와 1990년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제생활을 하던 중에 한 수녀님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유기서원을 하고 수도생활을 하던 수녀님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한 심장병에 걸렸다.

수녀원에서 나와야 하는데 갈곳이 없어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가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심장이 잘 뛰지 않았고 건널목 보도블럭 턱을 넘을 수도 없을 정도의 부정맥이라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종신서원 수녀가 아니라 수녀원 규칙상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수녀원장님도 울먹울먹하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수녀님의 부친은 당시 지방군수직을 정년 퇴임하신 완고한 분으로 출가했으니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하더란다.  

그는 그 수녀님을 돌보기 위해 사제복을 벗고 서류상 혼인신고를 했다.

월세방을 얻어 우유배달을 했다. 기타학원을 열어 학생을 가르쳤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수녀님을 정성을 다해 보살펴 12년을 더 살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아는 천주교 최창무 주교님이 조당(장애)을 풀고 다시 사제로 불러들였다.

분도수도원에서 함께 살자는 초대도 받았다. 총신대학에서도 가르치라는 요청이 왔다.

그러던 차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이쁜이 신부와 기도모임을 하게 되었고 토요일마다 피정지도도 맡게 되었다. 

유낙준 주교님이 대전교구 주교로 피선되어 승좌를 하고서 김규돈 신부님을 불러 무릎을 꿇으며 성공회에 들어올 것을 간곡히 청했다 한다. 

그는 그런 주교의 모습에 기꺼이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그는 원주교회 협동사제와 노인복지센터장을 맡아 사목생활을 했다.

그는 모든 수입을 가난한 노인들의 냉장고를 채워주기 위해 아낌없이 다 썼다.

그러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나의 집, 재산, 통장에 남아있는 돈이 늘 불편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설악산 케이블카 건설에는 온 힘을 다해 격렬하게 반대를 해서 유명세를 탔다.

그는 부당한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김경일 신부(성공회 대전교구 은퇴 사제).
김경일 신부(성공회 대전교구 은퇴 사제).

나는 최근에서야 내가 20여 년 전에 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토마스 머튼, 장 바니에, 윌리암 존슨의 저서를 번역했던 분이 김 신부님이란 걸 알고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또 한번 그의 열정적인 삶에 감탄했다. 

그는 33년간 오직 약자와 빈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역한 깊은 영성을 지닌 사제다. 

나는 그를 예수님을 오직 본질로만 추구한 사제 중의 사제라고 생각한다.

김규돈 신부님처럼 온몸을 바쳐 치열하게 사목하신 분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목의 본질을 무엇인지?

김규돈 신부님이 삶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아마도 신부님의 마음은 직권면직을 당한 지금도 자신의 손길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에게 오롯이 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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