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광주극장의 관객들과 만났던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이 지난 7월, 10여년 만에 회고전으로 다시 찾아왔다. 
어느 덧 여름이 지나 서늘한 가을 날씨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은 특히 겨울과 어울린다.

ⓒ 성냥공장 소녀
ⓒ 성냥공장 소녀

극중 스칸디나비아 반도, 핀란드의 풍경도 그러하지만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는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마주하는 냉혹한 현실을 가감없이 포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메우는 건 사회에서 주변화되는 노동자와 노숙인, 난민들이며, 사회적 그늘에 놓인 이들은 차가운 현실과 직면한다.

한편으로, 쓰린 현실 속에서도 결연한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소박하고 따뜻한 연대로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89)] 가운데 하나로 묶이기도 하는 <성냥공장 소녀>는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냉혹한 영화일지 모른다.

카우리스마키 영화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페르소나와도 같은 배우 카티 오우티넨이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분한 <성냥공장 소녀>는 억압과 착취에 놓인 인물의 절망과 분노를 응시하는 냉정하고 차가운 사례로 선명하게 남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환경미화원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천국의 그림자>나 현장에서 일하는 광부를 담아내는 <아리엘>처럼, <성냥공장 소녀> 역시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한 임금 노동자와 일터를 비추며 시작한다.

자막이 흐른 뒤에는 공장에서 성냥 공정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인양 세세한 몽타주로 이어진다.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음과 파열음 속에서 원목을 깎으면 저쪽 기계로 옮겨가고, 이런저런 공정을 거친 뒤 한 뒤 포장 컨베이어 매대에 있는 주인공 이리스(카티 오우티넨)에게 전달된다.

이리스는 이 성냥공장에서 일하면서 무력한 의붓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집세와 식사를 제공하고, 다리미질도 하고, 가계를 부양하는 노동자이자 가장이다.

의붓아버지는 이리스를 마치 자신이 고용한 하인처럼 취급한다.

월급의 일부로 구매한 꽃무늬 원피스를 보고, 그를 창녀라고 부르며 폭력을 행사한다.

어머니는 이리스에게 '엔젤리크' 소설의 모음집을 선물하거나 문을 열어주는 등 의붓아버지 보다는 이리스에게 친화적이지만, 역시 다소 서먹한 관계다.

ⓒ 성냥공장 소녀
ⓒ 성냥공장 소녀

대화할 때도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지 않고, 돌아선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렇다. 그렇게 이리스는 혼자다. 아무도 그를 신경쓰지 않는다. 

홀로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케익을 먹고, 영화관에 가서 막스 브라더스의 영화를 본다. 

<성냥공장 소녀>는 한 개인에 가혹한 풍경들로 선연하다. 하지만 시종 거의 무표정의 얼굴들과 제스처로 견인하는 단속적이고 서늘한 감각을 한층 강화하며 인물 간 단절된 관계를 형상화하는 장면 사이의 전환은, 카리우스마키의 여타 영화들이 그렇듯, 섣부른 연민과 동정을 추동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타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성냥과 마찬가지로, 기계화된 공정 속에서 도구처럼 타자화되는 사람을 무미건조한 방식으로 냉혹하게 담아낼 뿐이다.

이리스를 무심히 방기한 의붓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있는 TV에서는 전세계의 사회적 현안들이 중계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북경 천안문광장 작전으로 비무장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시민에게 무차별 난사를 감행하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소식,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로에서 가스관 폭발로 두 열차가 파괴되어 700명정도의 목숨을 앗아간 뉴스, 이란의 종교지도자 야툴라 호메이니가 사망한 특보. 로마 카톨릭 교회, 바티칸국의 수장인 교황의 순방 소식도 이어진다. 

이러한 전지구적 사회 이슈 속에서, 이리스는 그저 일터와 가정을 무료한 일상으로 반복하며 오가면서, 마음 한 편에선 사랑을 꿈꾸는 범상한 젊은 노동자일뿐이다.

하지만 치장을 하고 노래가 깔리는 클럽에서 누군가에게 선택 받길 기다리지만 아무도 그에게 구애하는 이는 없고, 동시에 누구에게로부터 안전한 관계를 보장 받지 못한 채 외롭게 고립되어 가는 중이다. 

영화에서는 시종 대사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극중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보이스 오버이자, 영화에서 이리스의 목소리가 가장 길게 전달되는 대목은 아르네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전달하려고 편지를 쓰는 장면이다.

편지가 잘못 전달될까봐 직접 아르네에게 전달할 거라며, 심사숙고하여 답장을 보내달라는 약속을 원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는 이리스에게 실낱 같은 희망의 보루인 셈이다.

하지만 자신의 임신 사실을 동료에게 알린 이리스에게 무심한 반응이 돌아온다.

ⓒ 성냥공장 소녀
ⓒ 성냥공장 소녀

그리고 잔인하게도 아네스에게서 수표와 함께 애를 지우라는 폭언의 문장과 함께 회신이 온다. 편지를 읽고 크게 상심해 뛰쳐나간 이리스는 사고를 당한다(이 현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가정을 홀로 견인해온 이리스는 도리어 자신을 짐으로 간주하며 지폐와 오렌지를 가지고 찾아온 의붓아버지에게서 절연을 통보당한다.
 

그런데 이리스는 더 이상 울거나 서글퍼 하지 않고, 도리어 과일을 야무지게 칼로 도려낸다. 이는 외부의 관계들과의 단절을 결심한 제스처인 셈이다.

이리스는 자신에게 음식을 제공해줬던 남자에게서 쥐약을 구매하고, 마침내 자신을 박대한 세상을 향한 복수를 계획한다. 첫 번째 대상은 아르네다.

아르네에게 이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에게 유산을 통보한 그에게 역으로 죽음을 통보하러 온 셈이다.

이제 이리스의 얼굴은 확연히 다르다. 눈빛에는 이전과 다르게 경멸의 감정이 서려있다.

다음 타겟은 관계 없는 한 남자다. 죽음을 선사한 후에 맥주 한 잔을 위해 바에 온 이리스는 더 이상 구애와 관심을 바라지 않는데, 홀로 앉아 있는 그에게 갑자기 자신에게 접근해 온 아이러니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독살한다. 

마지막으로 의붓아버지와 어머니가 남았다. 시

종 환한 표정과 미소를 찾아볼 수 없는 이리스가 미소를 머금었던 대목은 앞서 아르네와의 식사 자리, 매몰차게 애정이 없다고 거절을 통보당한 자리였다. 반면 여기서의 미소는 물론,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섬뜩하다. 

단 하나의 피 한 방울도, 비명도, 신음도 나오지 않는 이 모든 살인의 행적들은 다시금 무미건조하게 페이드 아웃으로 처리된다. 관객은 그저 이를 유추하고 짐작할 뿐이다.

이리스는 충실하게 자신의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모질게 냉대하기만 하는 세상에서 출구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그의 행위를 외부로부터의 정당성과 타당성의 도덕적 규범과 준거로 판단할 수 있을까.

영화가 담아내는 한 사람의 냉혹한 상황과, 인물의 발자취를 지켜보기 급급했던 이들이 팔짱 낀 채로 그를 훈계하는 것이 가능할까.

ⓒ 성냥공장 소녀
ⓒ 성냥공장 소녀

영화는 그렇게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식의 카메라와 관객의 도덕적 판단과 개입을 중단케하고, 무화시킨다.

이전의 무표정 속 얼굴과는 또 다른 차가운 무표정으로 집을 나선 이리스는 이로써 자신을 몰지게 대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완수하였다.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일에 복귀한다.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현장 체포를 위해 공장에 들어선 경찰들이다. 이리스는 일체의 저항 없이 체포에 응한다. 

한 사람이 연행되어 빠져나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메라는 우두커니 공장 내부를 한참 동안 담으며,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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