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명 칼럼] 부끄럽지 않은 언론
[이기명 칼럼] 부끄럽지 않은 언론
  • 이기명 <팩트TV>논설위원장
  • 승인 2022.09.16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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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껏 기사를 쓰면 된다.

해방 직후, 아주 어렸을 때 꼬마 친구들이 껌을 많이 씹었다.

어디서 난 돈으로 껌을 사서 씹었을까. 난 돈이 없었다. 껌은 무척이나 씹고 싶었다.

그날 어머니는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무심코 내 눈에 들어온 어머니의 지갑. 가슴이 뛰었다.

잠시 후 내 주머니엔 돈 몇 푼이 들어있었고 나는 그렇게 원하던 껌을 살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껌을 잊었고 어머니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린 아들의 범행을 아실까 모르실까.

그때 가슴 떨리던 기억은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잊히지 않는다. 이것도 양심인가.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온갖 참극도 다 겪었다.

일명 ‘빽관구’로 불리는 서울 지역에서 보급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했다.

ⓒ팩트TV 갈무리
ⓒ팩트TV 갈무리

박정희가 사령관인 6관구는 엄청난 부자 군대였다.

영등포역 앞에 야산처럼 쌓여있는 군용석탄을 민간인 트럭이 마음 놓고 퍼가서 장사했고, 지금 양평동 공병부대 시멘트 창고도 역시 민간인 트럭이 드나들며 시멘트 포대를 팔아먹었다.

당시 공수부대 보급담당 장교들은 우리 보급하사관들에게 큰 손이었다.

우리 쫄병들도 양담배만 피울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부대 안을 설치고 다녔는가. 깨끗한 군대. 웃긴다.

시골 출신 쫄병들이 간식으로 받은 건빵 한 봉지를 소주 한 병과 바꿔 마신다.

이를 지켜보던 통신이라는 기자가 취재한답시고 부대 행정과장을 찾아 보도 무마를 미끼로 쌀 몇 말을 뜯어간다.

■기자!! 무관의 제왕

오늘의 언론인은 부자인가. 그땐 참 가난했다. 배고팠다.

광화문 국제국장 뒤 속칭 ‘하꼬방’으로 부르던 판자대폿집에 저녁이면 기자들이 모였다.

돈이 없어 막소주도 외상이었다. 술에 취하면 쏟아지는 원색의 언어들. 개xx는 기본이다.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쏟아놓는 욕의 저수지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판을 잡는 것은 거의 동아일보 기자들이다.

그만큼 자신 있게 발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척 부러웠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의 동아일보 기자들에게 미안하다.

이제 거의들 고인이 됐다. 지금은 어떤가. 말을 말자.

언론과 촌지는 5·16 군사정변 이후 새마을운동 취재 다니면서 무척 친숙한 일이었다.

당시 도지사는 대령급이었다. 풍성한 촌지가 전해진다.

망설임 없이 챙겼고 취재를 마친 뒤 회사로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간부들을 기쁘게 했다.

쌀 몇 말 값 월급을 받던 간부들은 감지덕지했다. 그렇게 나의 취재는 썩어갔다.

촌지를 건네는 군 장교의 눈에 우리는 어떤 언론인으로 평가되었을까.

어느 해 추석 때 나는 후배에게 봉투를 건넸다. 촌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선배님. 고맙습니다만, 제가 이걸 받으면 다음에 선배님을 뵐 때마다 봉투가 떠올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봉투를 거절당했다.

나는 지금 환갑이 지난 그 후배를 매우 사랑한다.
 

■정치인과 언론인과 거짓말

ⓒ서울의소리 누리집 갈무리
ⓒ서울의소리 누리집 갈무리

어느 날 내 전화통에 불이 났다. 집이 압수수색(가택수색)을 당했으니 어찌하느냐는 것이다.

노무현후원회장인 내가 가택수색을 당했다니 언론으로서는 큰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깜짝 놀랐다.

가택수색이라니. 그런데 난 그런 일을 당한 일이 없다. 보도한 언론사 기자에게 직접 전화했다.

“무슨 가택수색인가?”

“선생님 가택수색 안 당했습니까?”

오보였다. 당시 노무현후원회장이었고 생수공장 건설 때 보증도 섰으니 뭔가 있으려니 생각하고 그야말로 알아서 쓴 것이었다.

벼락 맞은 것은 나였고, 오보를 보고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정치 문전조차 못 가 본 아내도 기가 막혔다.

“당연히 가택수색을 당할 줄 알고 썼습니다.”

기자는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로 끝날지 모르지만, 멀쩡한 대낮에 날벼락 맞은 나와 내 아내는 어쩌란 말인가.

졸지에 나는 노무현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준 정치꾼이 되었다.

창간 독자요 창간인 청암 송건호 선생의 제자인 나에게 유일하게 신뢰했던 신문인 한겨레가 벼락을 때린 것이다.

전화 한 통 없이 그냥 알아서 써 갈긴 기사로 난 만신창이가 됐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한마디로 끝나는가.

기자의 보도는 신뢰가 생명이다. 그래야 옳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

어느 누가 오늘의 기사를 생명처럼 여겨야 할 기자의 기사를 믿는가.

자신이 쓴 기사에는 책임이 따른다. 맞는가. 맞아야 한다. 내 자식도 기자였고 수많은 후배 기자가 있다.

그러나 자기 기사에 책임지는 기자를 찾기는 힘들다. 일일이 책임지다가는 기사 한 줄도 못 쓴다고 한다.
 

■당신 지금 꿈꾸고 있는가

ⓒ뉴스타파 누리집 갈무리
ⓒ뉴스타파 누리집 갈무리

자유당 시절 그 더러운 언론판에서도 동아일보는 시들지 않는 꽃이었다.

수많은 기자가 두들겨 맞고 길거리로 쫓겨났다. 할부 책 장사를 위해 책 보따리를 옆에 끼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언론자유라는 소신은 꺾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 없지만, 그들의 피나는 투쟁을 업은 후배 기자들이 언론 현장에서 살아간다.

어떤가. 선배 기자들의 언론자유를 위한 피나는 투쟁을 기억하는가.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자유스럽게 기사를 쓴다. 얼마나 자유로운 언론 천국인가.

국회에서 발언하는 의원들의 말에 진실을 얼마나 발견하는가.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의 기사를 보면 어떤가. 기자들 자신도 알 것이다.

의원들 발언을 기사로 쓰는 기자들도 한심할 것이다.

저걸 기사라고 써주니. 할 수 없다. 직업이니까. 자신이 쓴 기사를 읽어보는가.

어느 후배 기자는 자신이 쓴 기사를 읽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의원도 자신의 국회 발언이 얼마나 황당한지 잘 알 것이다.

비대위 정치, 가처분 정치, 고소만 하다가 판은 끝난다.

나를 비난하는가. 욕이야 백 번을 먹어도 겁 날 것 없다. 죽는 날까지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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