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임'(에밀리크 그라벨)은 2018년 프랑스를 배경으로 두며 노란 조끼 시위로 인해 전국적으로 교통이 마비된 가운데 두 아이를 키우는 어느 싱글맘이 파리 근교에서 중심부로 어렵게 출퇴근하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작,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주인공 ‘쥘리’는 파리의 5성급 호텔 룸메이드다. 교통 파업으로 인해 매일 지각을 일삼던 와중에 상사 몰래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집에 돌아갈 차편이 없어서 퇴근 역시 늦어지자 그녀의 아이들을 돌봐주던 이웃집 할머니는 매일 같이 힘듦을 호소한다.

시위로 인해 평온했던 일상에 하나둘씩 균열이 일어나지만 이직이라는 목표 하나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쥘리’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주)슈아픽처스
ⓒ(주)슈아픽처스

이 영화를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은 ‘쥘리’가 지닌 끈질긴 생명력이다. 교통 마비로 혼란한 플랫폼 위, 그녀가 열차로 인해 발생하는 강풍을 온몸으로 맞서며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의 중심적 이미지는 이를 잘 대변한다.

삶이 여러 장애물로 인해 위태로워도, 꿋꿋하게 나아가 꼭 목표를 이루고 말겠다는 인물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개인의 사소한 고충으로 그칠 법한 이야기를 한층 더 각별하게 완성한다.

또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가 인물의 특출난 의지와 결합했을 때, 거대 서사 못지 않은 깊은 몰입감을 선사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몸소 증명한다.

인물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의지를 그려내는 데 있어 적절히 제 몫을 해낸다.

관객은 인물의 등 뒤에 배치된 카메라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인물이 어떻게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내는지 감각적으로 목도한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상황들은 누구든 충분히 공감할 법한 것들이다.

ⓒ(주)슈아픽처스
ⓒ(주)슈아픽처스

 

이를테면 아이의 신발 끈을 단정하게 묶어 주던 어머니의 평범한 손길은, 한참 뒤 아이가 트램펄린에서 놀던 중 느닷없이 낙상하자 달래는 급박한 손길로 이어진다.

동료들과 화기애애하게 보내던 점심식사 시간은, 다음날 홀로 탈의실에서 식사를 마친 '쥘리'가 은밀히 다른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가는 극적 상황으로 치환된다.

아이가 트램펄린 밖으로 이탈한 것처럼 '쥘리' 또한 근무 중 무단이탈을 하게 된 상황.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영화 곳곳에서 직간접적으로 투영된 셈이다.

언뜻 보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인해 ‘쥘리’가 비현실적인 인물로 비춰질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물에게 이 같은 의지의 불씨를 지피는 것은 바로 현실감각이다. ‘쥘리’가 설정한 목표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보다 더 큰 회사로 이직을 원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유사한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던 이른바 ‘경단녀’(경력단절여성)였고, 심지어 이직을 원하는 자리는 이전에 맡았던 직급보다 낮은 자리었기 때문에 ‘쥘리’의 행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타협적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주)슈아픽처스
ⓒ(주)슈아픽처스

여기에다 매일 같이 진행되는 교통 파업과 자신의 배설물로 화장실을 온통 엉망으로 만든 부자 고객, 아군에서 점차 적으로 변해가는 주변 동료와 이웃들까지. 고통의 연속인 하루하루는 오히려 그녀를 시대가 바라는 관성적 투사로 만들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현실적인 인물로 완성시킨다.

뿐만 아니라 홀로 두 아이를 양육해내야 하는 어려움은 혁명의 가치를 외면토록 하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사실 주인공의 숨 막히는 삶은 ‘풀타임’(full time)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쉽게 연상할 수 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삶.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싱글맘으로서의 개인적 어려움도 모자라 교통 파업이라는 집단적 어려움까지 더해지는 교차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온몸으로 부딪히며 치열하게 뛰는 것뿐이다.

출근에, 면접에, 집에 늦지 않기 위해 숨이 벅찰 정도로 뛰어야 한다. 그래야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을 겨우 활용할 수 있다. 

죽을 만큼 숨이 벅차올라야 결국 죽지 않고 사는 사즉생(死卽生)의 삶, 바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두 번째 아이러니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의 시작을 비롯하여 중간중간 잠자는 ‘쥘리’의 숨소리를 오랜 시간 확장된 사운드로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다.

ⓒ(주)슈아픽처스
ⓒ(주)슈아픽처스

초반 관객의 불안감을 극도로 증폭시킨 이 숨소리는 처음에는 관객의 의구심을 자극하다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쥘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무언의 증거로 작동되면서 묘한 안도감을 전한다. 관객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감독의 혜안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러다 마지막의 시퀀스에서 ‘쥘리’는 다시 플랫폼 위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기다린다.

영화의 초반처럼 말이다. 

그녀가 또 어떤 선택을 할까, 다시금 불안감이 관객에게 엄습한다.

이 또한 관객의 마음을 예상한 듯한 감독의 혜안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이때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사즉생의 기적을 바라며 열린 결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