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 일상에 스며든 불안, 이로부터 조성된 공포
'큐어' 일상에 스며든 불안, 이로부터 조성된 공포
  • 김서율 시민기자
  • 승인 2022.08.0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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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한 불안이라는 현상이 결코 쉽게 지워질 수 없음을 웅변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호러 역작

동시대를 대표하는 감독의 걸작으로 회자되거나 거론되곤 하였지만, 영화제나 특별전 등을 통한 기회를 제외하면 정식 개봉관에서 관객들과 만나지는 못했던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 중에 한 편이 세월이 흘러 마침내 관객 앞에 도착했다.

처음 세상에 공개된 지 25년만에 4K 리마스터링으로 복원된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다.

ⓒ 큐어(1997), 구로사와 기요시
ⓒ 큐어(1997),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는 이후 호러뿐 아니라 가족, 첩보, 멜로 드라마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해온 구로사와 기요시의 장기와 진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장르적 관습들을 차용하고 끌어들이거나, 이를 적절히 배합하는 솜씨는 로망 포르노 장르를 연출하는 것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기요시의 독특한 이력에서도 기인할 것이다.

<큐어>는 공포 장르의 외양을 띠면서도, 미스테리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물처럼 시작하여 정신분석, 최면술 등 다채로운 사이코 스릴러의 형태로 뻗어간다.

많은 이들이 기요시의 최고작으로 꼽곤 하는 <큐어>는 기요시가 내놓은 이후의 영화들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는 원형과도 같은 영화일 뿐 아니라, 능란한 장르적 운용을 통해 현대 사회가 내재한 불안의 감정을 능숙하게 녹여낸 작품이다. 

영화사에 굵직한 종적을 남긴 영화들은 상호 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요시의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조나단 드미의 <양들의 침묵>(1991)을 보고 경탄하여 이에 영감을 받아 극장 근처 카페에 앉아 1시간 만에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용의자와 형사 간의 심리적 대립과 미묘한 유대감, 이로부터 발현되는 불안과 긴장의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구성을 생각하면 <큐어>에서 <양들의 침묵>의 인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요시의 오랜 팬을 자처하며 <큐어>를 극찬해온 봉준호 감독 또한 <살인의 추억>이 <큐어>에 많은 영향을 받은 영화라고 언급해오곤 했다.

<큐어>는 희생자의 몸에 X자를 각인하는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도쿄를 무대로 한다.
 

ⓒ 큐어(1997), 구로사와 기요시
ⓒ 큐어(1997), 구로사와 기요시

병원, 화장실, 자택 등 일상의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규명하기 위해 수사에 나선 다카베 형사(야쿠쇼 코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살인으로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회사원, 초등학교 교사, 경찰, 의사 등으로 특별한 잡음 없이 삶을 영위해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미궁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다카베는 그들이 모두 마미야를 만난 후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추적하고 탐문한다.

<큐어>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일상 속에 깊게 뿌리내린 불안감이 증폭되어 빚어진 균열들이 어떻게 사회와 인간을 서서히 내파하는지에 집중한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뒤틀린 내면과 이중성을 체화하는 사람들은 마미야라는 한 개인의 최면에 홀려 범죄를 자행한 인물들만이 아니다.

마미야는 냉철한 형사와 감정적인 남편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오가는 다카베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다카베가 자주 들리는 세탁소에서 갑자기 화난 말투로 누군가 죽여버리겠다는 혼잣말을 하다가 세탁소 직원이 오자 돌연 태연한 제스처로 세탁물을 찾아가는 손님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범행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듯한, 범상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을 쫓는 <큐어>는 현실 세계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들로 구성된 환영으로부터 공포를 끌어내지 않는다. 

영화는 사회에 암약한 소외감, 불안감, 단절감, 억압, 분노 등의 감정을 상기하게 한다.

실존적인 질문(’당신은 누구야?‘)을 지속해서 던지는 마미야는 이러한 감정들의 근원은 무엇인지를 캐묻는 셈이다.

많은 논자가 <큐어>를 일종의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 보는 것도 그런 점에서 새삼스럽지 않다.

영화의 종반부, 다카베는 탈출한 마미야를 총살하고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식사에 임한다.

이전까지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하던 그는 이제 겉으로는 무척이나 평온해 보인다.

그런데 마미야가 사라진 자리는 정말 평화로운가. 과연 다카베는 치료(cure)된 것일까. 무엇이 해결된 것인가. 

ⓒ 큐어(1997), 구로사와 기요시
ⓒ 큐어(1997), 구로사와 기요시

식사를 마치고 후식인 커피를 음미하는 다카베의 옆얼굴에서 천천히 포커스를 옮겨 레스토랑 직원을 롱테이크로 따라가는 카메라는, 이내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칼을 집어 드는 직원을 담아낸다.

그리고 영화는 돌연 끝맺는다. 다카베는 마미야가 이야기하던 ’텅 빈 내면‘을 받아들여 마미야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탄생한 또 다른 수많은 마미야들이 세계를 수놓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든 불안이라는 현상은, 이를 일으킨 원흉으로 보이는 개체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지워질 수 없는 불안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큐어>는 이를 소름 끼치게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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