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사형수 고 정동년 고문님을 추모하며

고인이 된 정동년 고문은 광주 전남 민주화 운동 동지회 고문으로 계셨다.

별세 이틀 전에 민주 원로 초청 한마당을 통해서 팔순잔치를 했다.

그때 필자는 상임대표로서 축시를 낭독했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해 뜨는 언덕에 올라/ 시대의 어둠을 뚫고/ 민주 평화 인권 새벽길 열어준/ 역사의 파수꾼// 소통과 연대 얼싸안고/ 화합과 공감으로 춤추는 영원한/ 무등산 큰 바위// 멈출 수 없는 대동세상/ 죽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어깨동무하며 뚜벅뚜벅 걷는/광주 전남 민주화운동 동지 만세./// 이처럼 고 정동년 고문님은 죽을 때 까지 이 걸음으로 어두운 역사를 걷다가 가셨다.

지난 5월 29일 서거한 '5.18 사형수' 고 정동년 5.18재단 이사장.
지난 5월 29일 서거한 '5.18 사형수' 고 정동년 5.18재단 이사장.

정동년 고문은 1964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이 될 때부터 역사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활동을 온 몸으로 실천 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굴욕외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행동으로 옮겨 반대 시위로 구속되었고 학교에서는 제적되었다.

그러던 중에 15년 만에 1980년 3월에 전남대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이처럼 치열한 삶을 통해서 시대의 양심이 되었다.

특히 정동년 고문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것은 1980년 5월 17일 밤에 예비검속으로 검거가 되었다.

다음날에 일어난 5∙18 항쟁을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광주민중항쟁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 혹독한 고문으로 김대중에게 시위자금을 수령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이다.

하지만 시위자금을 대주어 광주민중항쟁을 배후 조정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전남대 복학생인 정동년에게 5월5일과 8일 2회에 걸쳐 김대중은 김상현을 통해 소개받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요청한 시위자금 5백만원중 3백만원을 주었고 그 뒤에 2백만원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공소장-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그런데 김대중은 정동년을 1985년에 처음 보았으며 5∙17 이전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동년은 청문회에서 고문에 못이겨 날조한 것에 진술을 했지만 양심에 가책으로 플라스틱 숟가락을 뾰족하게 갈아 동맥을 잘라 두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한 것이다.(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이때부터 정동년 고문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의 당사자이면서 5월의 사형수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정동년 고문은 정의를 위하여 가시밭길을 걷는 올곧은 시대의 의인이 되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수로 2년여 옥중생활을 하다가 1982년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이후에도 가열차게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투쟁의 현장에 서 있었다.

광주구속자협의회 사무국장으로 민주화를 위해 억울하게 투옥된 양심수를 위해 함께 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이 5∙18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공작을 했다.

군과 정보기관, 지자체까지 동원을 해서 ‘비둘기 계획’이란 이름으로 망월동 묘역이 5∙18상징이 되지 않도록 사망자를 연고별로 분류해서 묘지를 이장하면 유가족에게 이전비와 위로금을 준다는 공작하는 일이 1983년에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 유가족들과 함께 정동년 고문은 그 공작에 맞서 투쟁을 한 것이다.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에서 대대적인 공안 탄압을 했다.

그때 고인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인천시위 주동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0월을 받게 되면서 집시법 위반으로 세 번째 옥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1987년 5월 18일 망월동 묘역(현재는 민족민주열사묘역)모였다.

5∙18결의문은 예정에 없이 범도민운동 본부 발족선언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로 이름을 바뀌면서 오월운동에서 정동년 회장이 상임공동의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1988년에는 국회 광주 청문회에서 신군부의 고문수사를 폭로하게 된다.

5월 광주정신 계승을 다짐하는 5∙18 전야제를 추진하는 것 뿐 아니라 학살자를 검찰에 고발하고 불기소 처분에 수사결과를 검증하는 일로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광주 구속자협의회 사무국장과 5∙18 민중항쟁연합회 상임의장,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 전남 연합 공동의장으로 치열한 시간들을 거리에서 보내게 된다.

1988년에 조선대 교지 편집장 이철규 사인규명대책위 공동의장이 되어 진상규명을 하는 과정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1년으로 네 번째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출옥 후에도 5∙18 학살 책임자 처벌 투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면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5∙18 기념재단 이사직을 감당하게 된다.

정동년 고문은 젊은 시절 30-40대를 감옥에서 보냈다. 5월운동의 전사생활이었다.

이후에는 시민후보로 남구청장에 추대된 것을 알고 국민회의에서 공천자로 발표해서 남구청장과 새 정치 국민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을 했다.

고인은 계속해서 광주를 5월 공동체 정신을 회복한 도시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다.

30주년 5∙18행사위원장을 지내면서 시민강좌를 실시했다.

그동안 안산도시개발 사장을 지내면서 밖에서 광주를 바라보기도 했다.

70대에 이르면서 작은 농원을 가꾸면서 건강상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2020년 5∙18 40주년을 맞이할 때 한겨레 신문 <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 날 그 사람들 광주의 증인 ‘정동년’편에서 안관옥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40돌을 맞은 소감을 묻자 먼발치에 있는 무등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광주엔 무등산이 있잖아요. 무등은 등급이 없다. 차별이 없다. 그런 뜻이지요. 무등이란 이름처럼 광주가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이 든 운동가가 간직한 마지막 꿈이지요.” 정동년 고문은 평등부부상과 평등문화실천 가정상을 수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동년 고문의 소박한 꿈은 2021년부터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42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서 행사를 갈무리해 갔다.

별세 하루 전 5∙18문학상 인사말을 할 때 한 유머를 필자는 잊을 수 없다.

“내가 인사말을 써준 것을 읽지만 나도 한 때는 글을 쓰면서 문학을 좋아했다”는 그런 내용으로 참석자들을 웃게 했다.

평소에 묵직하면서 잔잔한 미소와 함께 했던 기억을 간직한다.

영결식 때 유가족 인사 가운데 ‘할아버지를 천사’라고 말한 것처럼 암울한 역사에 보내주신 하늘의 천사였다.

시대와 역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넘었던 고 정동년 민주화 운동 원로 고문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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