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에 의한 5.18진상규명조사의 최종 결과보고서를 가장 영예롭게 확인해야 할 당사자가 서둘러 세상을 뜨셨다.

비보의 황망함에 옷깃조차 여미어지지 않는다.

‘광주사태’의 수괴로 조작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던 정동년의 민주화 여정은 1964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5.16군사쿠데타로 국가권력을 강점한 박정희가 한일외교정상화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다.

29일 오전 심정지로 향년 79세에 별세한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빈소가 광주 동구 금호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예제하
29일 오전 심정지로 향년 79세에 별세한 .5.18 사형수'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빈소가 광주 동구 금호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고인의 장례는 '고 정동년 선생 5..18민주국민장'으로 3일간 치러지며 오는 31일 오전10시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에서 영결식을 엄수한 후 국립5.18민주묘지에 영면한다. ⓒ예제하

흔히 6.3사태로 불렸던 한일굴욕회담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처음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 정동년의 삶은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이를 바로 세우려는 지난한 투쟁의 현장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는 분이었다.

옥고를 치른 것만도 4번이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사건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물론 선출직 정치인으로 잠시 외도 아닌 외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분의 삶은 그와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원래의 자리를 한사코 지켜오셨고, 5.18민주화운동 제42주년을 기념하는 모든 행사를 마무리하고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 당시 여러 단체로 나뉘어 있던 5.18민주화운동 관련단체의 엽합체였던 ‘5.18민주화운동단체연합’의 상임의장으로 그 분과 공식적인 일로 인연을 맺었고, 3년 후인 1994년 5월 광주학살책임자들을 서울지검에 고소하는 과정에서부터 같은 해 전두환 등의 책임자 16명을 법정에 세우기까지 그 분은 상임대표로 나는 간사로 실무를 담당했다.

5.18민주화운동의 한 사건에서 두 ‘수괴’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광주사태의 수괴’ 정동년과 1996년 12.12와 5.18사건 재판에서 ‘군사반란 및 내란과 내란목적살인죄의 수괴’ 전두환이다.

정동년은 조작에 의해 그에게 씌워진 수괴의 누명을 벗기려는 교황청을 비롯한 세계의 노력에 의해 구명되었고, 법률에 의해 무죄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끝내 부정과 왜곡으로 일관하다가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세기의 재판’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 죄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 사건의 두 수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극명한 차이가 새삼 ‘진실과 정의’의 가치를 가늠케 한다.

전두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 심지어 5.18진압작전에 참가했던 당시 계엄군들에게도 무거운 고통을 전가해 놓았다.

광주의 피해자들을 비롯한 신군부의 정권찬탈과 정권강점 시기의 국가폭력에 의한 수 많은 피해자들은 전두환으로부터 단 한마디의 사과도 받을 수 없었다.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겸 제42주년 5.18행사위원장이 28일 오후 5.8민주광장에서 열린 부활제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부활제가 고인의 살아생전  마지막 행사로 남게 됐다. ⓒ예제하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겸 제42주년 5.18행사위원장이 지난 27일 오후 5.8민주광장에서 열린 부활제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예제하

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님의 영면마저 순수한 조의만으로 슬픔을 채울 수 없는 것은 대비되는 두 ‘수괴’의 삶이다.

그 삶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여전히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개인으로서는 정동년 이사장님의 비보는 더 황망하고 비통할 수밖에 없다.

5.18진상규명의 최종결과 보고서를 가장 먼저 그 분에게 보이고 싶었고, 보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생각다.

그 순간까지 건강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해 여름 그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요청으로 2시간이 넘도록 당신이 영어의 생활을 했던 옛 광주교도소 그 감방 안에서 진술조사에 응해주셨고, 이 모든 과정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고 정동년 이사장님을 떠나보내면서 그동안의 인연을 회고하고, 그 인연에서 비롯된 그 분의 바람과 계승해야 할 가치 그리고 정신을 되짚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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