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담대하고도 소박한 시선
공존이 사라지고 상생이 희미해진 시대에 찾아온 우정에 관한 영화
사회와 개인, 자연과 인간에 대한 거대한 역사이자 소소한 우정의 이야기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2019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화 해제와 거리두기 해제가 시행된 요즈음, 코로나가 발발한 후에 극장에서 관람했던 몇 안 되는 영화들을 떠올려본다.

그중에서 처음 영화를 본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꾸준히 재생되었던 한 영화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비대면이 전면화된 코로나 재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에 처음 공개되었고 작년 말에 정식 개봉했던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다.

접촉이 희미해지고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감각조차 잃어가는 시기에 도착한 영화이자, 우연한 만남 속 긴밀한 우정을 다루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상한 위안마저 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 중에서 가장 보고 싶은 신작 중 하나가 바로 라이카트의 <쇼잉 업(Showing Up)>이기에 복기할 시기로도 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던 찰나였다.

켈리 라이카트는 마땅히 가진 것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미국의 평범한 노동 계급에 시선을 둬왔다.

가정에 환멸을 느낀 채 박차고 나온 코지라는 여성이 탈주하는 장편 데뷔작 <초원의 강>, 집도 금전도 없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알래스카로 향하다 난항을 겪는 여성을 담아내는 <웬디와 루시>를 비롯하여 그의 인물들은 길 위를 떠돌면서 이정표 없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한 대담에서 라이카트는 자신의 영화를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사람들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위험에 노출된 라이카트의 인물들에게 길이란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들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물적 조건을 찾고, 더 나은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길을 찾을 뿐이다.

<퍼스트 카우> 역시도 연장선에 있다. 두 주인공인 유대인 쿠키와 중국인 킹 루 또한 기회의 땅이라 불렸던 미 대륙에서 소박한 꿈을 함께 가꾸어나가기 위해 여정을 이어간다.

<퍼스트 카우>
<어떤 여자들>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에서 이전에 자신이 내놓았던 특별한 서부극인 <믹의 지름길>과 마찬가지로 1.37:1 비율을 채택한다.

<퍼스트 카우>는 좁은 프레임 속 강가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증기선을 서서히 비추면서 시작한다.

<믹의 지름길>의 정사각형 프레임이 황량한 사막을 통과하는 일행들의 불안함을 드러낸다면, 자연에 깊이 밀착하여 살아가는 두 주인공에 집중하는 <퍼스트 카우>는 이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 친밀한 정서를 포착하기에 적절한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라이카트의 전작들을 본 사람이라면, 도입부에서 기시감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라이카트는 삼엄하고 고요한 환경 속에서 기차나 마차 등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풍경을 포착해오곤 했다.

특히 프레임의 끝자락에서 천천히 철도 길로 진입하는 기차를 비추며 포문을 열었던 전작 <어떤 여자들>의 오프닝 또한 떠오를 수 있다.

그런데 <퍼스트 카우>는 여기서 돌연 비약을 시도한다. 현대 미국 북서부의 컬럼비아 강변을 거닐다 우연히 나란히 파묻힌 두 구의 유골에서 갑자기 두 세기도 전인 19세기 초의 미 대륙 역사의 한복판으로 시간을 도약한다. 

<퍼스트 카우>

영화의 본 배경은 정식으로 미국령이 되기 전까지 영국과 미국의 공유 영토였던 1820년대의 오리건이다.

이곳은 자본과 권력을 가진 대지주, 아메리칸 원주민과 유목민, 이주해온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한데 모인 기회의 땅인 동시에 아직 자본주의가 온전히 확립되고 정착되기 전이다.

여전히 기초적인 수준의 물물교환, 등가교환이 자리하고 있다. 요리사로서 재능을 지닌 쿠키와 사업가의 기지를 발휘하는 킹 루는 대륙을 건너와 마을 최초의 소가 된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내 빵을 만들어 금전을 마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후대의 지배 계급의 역사가 도래하지 않은 시점인 19세기 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의 땅처럼 보인다. 역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에서 기회를 엿본다는 킹 루의 말처럼 말이다.

마치 총격전이 요리로 대체된 웨스턴으로 보이기도 하는 <퍼스트 카우>는 약육강식의 질서 아래에서 숱하게 행해진 탐욕과 약탈의 잔혹사와는 저만치 거리가 있다.

대신 영화를 가득 메우는 건 우연한 인연으로 함께 하게 된 두 주인공의 채집, 낚시, 요리, 장작 패기, 빗자루질, 소젖 짜기 등 노동의 일상이다. 

<퍼스트 카우>를 본 이들은 흔히 봐오고 익숙했던 기존의 서부극과는 다른 요소들을 짚곤 한다.

스크린에서 숱하게 묘사되어 온 서부 개척 시대의 초기 양상과는 완연히 상반되는 요소들로 구성된 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퍼스트 카우>

사회에서 주변화되는 사람들 곁에 라이카트의 카메라가 머물렀던 점에 주목해왔던 이들은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노동, 자본, 환경, 여성, 인종 등의 의제나 키워드를 거론해오곤 했다.

<퍼스트 카우>를 폭압적인 질서로 세워진 난폭한 서부의 세계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이들을 다루는 대안 서부극, 안티 웨스턴 등의 수사를 빌어 논하곤 한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영화를 상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라이카트라는 감독과 그의 영화들, 그리고 <퍼스트 카우>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딘가 불충분하다.

표면상에 드러나는 장르적 관습을 배반하는 점을 거론하거나, 소재를 호명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라이카트의 영화와 <퍼스트 카우>가 곧 기존의 시선과는 차별화된, 일종의 안티테제로서 기능하는 영화라는 논지에 역으로 갇힐 수도 있다.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요소들을 제외하고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 영화도 아니며, 그러한 구성만으로 특별한 영화도 결코 아님에도 말이다.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정반대로, 혹은 다른 시각으로 기록되거나 재구성되곤 하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중 배경으로부터 이백여 년이 흐른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자리 하게 되었는지의 과정에 대한 해석은 다를지언정, 적어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있다.

서부극을 관람해온 사람이라면 영화에서 개척 시대의 역사가 어떻게 구현됐는지 봐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면에서 기존의 역사, 영화와는 대비되는 성격을 지닌 <퍼스트 카우>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기도 쉽다.

그런데 <퍼스트 카우>를 이야기할 때, 영화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형성된 기존의 선험적 지식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라이카트가 어떻게 영화에서 역사를, 자연을, 인간을 바라보고 담아내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퍼스트 카우>

<퍼스트 카우>의 엔딩 크레딧에는 한 사람에 대한 헌정이 등장한다. 라이카트가 경의를 표하곤 했던 실험 영화감독인 고(故) 피터 허튼(Peter Hutton, 1944~2016)이다.

풍경을 바라보며 그 속으로 들어가 작업하는 방식에 관하여 라이카트에게 많은 영감을 준 동료이자 선배 창작자였던 피터 허튼을 언급하면서 라이카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피터 허튼 같은 사람은 우리가 시간을 감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다른 하나는 관객이 보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는 차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라이카트는 후자의 마음으로 작업을 지속해온 감독일 것이다.

앞서 역사적 맥락을 어쭙잖게 끌어들였지만, 관련된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퍼스트 카우>라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말하자면 <퍼스트 카우>는 지나온 역사를 외부의 시선으로 폭로하거나 역사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상을 규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내부에 머물면서 품어내는 영화다.

자신의 영화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고 말한 라이카트처럼, 영화는 그를 닮았다. 

영화는 한없이 거대할 수 있는 역사의 한복판에 더없이 사소한 두 사람의 진솔한 우정을 채워 넣는다.

역사에서 인간으로 뿌리를 내리면서도, 인간에서 역사로 가지를 뻗는 <퍼스트 카우>에서는 중심부와 주변부,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은 손쉽게 분리되지 않은 채로 때론 불화하고, 때론 공존한다. 

섬세하고 사려 깊은 쿠키와 원대한 포부를 드러내는 킹 루는 상반되는 성향을 지녔음에도, 공동의 이해관계 속에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유대감으로 공생한다.

그렇게 <퍼스트 카우>는 사회와 개인, 자연과 인간을 둘러싼 겹겹의 이야기를 파생한다.

영화의 종반부, 자본금을 모아 앞길을 모색하던 두 사람은 자신의 암소에게서 우유를 짜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주에게 쫓긴다.

둘도 없는 관계가 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데, 그 과정에서 쿠키는 다치게 된다. 

쿠키를 부축하다 쉬어가기 위해 킹 루는 바로 오프닝에서 이들이 유골로 발견된 자리에서 함께 눕는다.

의지할 사람 하나 찾기 어려운 험준한 세세상에서 마침내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하게 된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장소에서 눈을 감는다.

이들의 운명을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쿠키와 킹 루, 두 사람이 <퍼스트 카우>라는 영화에서 쓴 역사의 기록은 이를 지켜본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게 된다.

두 주인공의 여정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우정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퍼스트 카우>

현대극에서 출발하여 서부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듯한 <퍼스트 카우>를 생각하며 글의 서두로 돌아와 본다.

공동체와 개인을 둘러싼 쟁점은 재난 상황에서 일상 회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곤 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향은 가속화되어 왔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연대를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연대의 가능성을 섣불리 말하기보다는 연대의 불능을 먼저 짚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작금의 각박한 세상 속에서 끈끈한 유대감을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척박하고 거칠었던 서부 개척기에서 우정을 나누는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퍼스트 카우>를 본다는 건 묘한 위안을 준다.

장밋빛의 미래가 아닌 가혹한 앞날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같은 세계를 함께 꿈꿀 수 있을까.

이에 관하여 거창한 해답이란 게 준비되어있을 리 만무한 입장이지만, 할 수 있는 답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한 인터뷰에서 라이카트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그래도 어떻게든 '탐색이 계속되길 바란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