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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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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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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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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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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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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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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5.30
(향년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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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생으로, 광주학살에 항의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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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
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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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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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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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6.9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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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서울 이화여대 앞 네거리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고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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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
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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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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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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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5.27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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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으로, 학내에서 산발적인 시위 도중에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치고 투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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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
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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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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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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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0.12
(향년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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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남대 학생회장으로 광주항쟁과 관련 구속되어 5·18 진상규명 요구 단식 중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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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
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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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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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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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8.22
(향년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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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광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광주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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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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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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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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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0.21
(향년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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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대 재학 중 9월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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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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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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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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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3.16
(향년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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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 졸업, 안양 박달 예비군 훈련장에서 전두환 정권을 옹호하는 시국훈화에 대해 반박, ‘정권 탈취 야욕에 불타 광주시민 수천 명을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라고 외친 후 교관들에 의해 폭행,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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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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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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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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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5.20 (향년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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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재학 중 학생운동 참여, 86년 서울대 오월제 행사 중 학생회관에서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미 제국주의 물러가라” 외치며 분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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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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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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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6.25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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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이며, "전두환 및 5.18 쿠데타 주동자는 물러가라"고 주장하며 목포역에서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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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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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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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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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3.8
(향년 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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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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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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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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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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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5.25
(향년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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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부산 상고 앞에서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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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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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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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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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2.10
(향년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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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생으로,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42일간 학내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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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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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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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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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5.15
(향년 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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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으로,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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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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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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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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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5.26
(향년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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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생으로,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학교 교정에서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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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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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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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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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6.6
(향년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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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생으로,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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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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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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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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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2
(향년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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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서 ‘광주학살 원흉 처단’과 노태우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투신,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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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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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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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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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17
(향년 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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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 「전두환 장기집권 음모저지 및 민족민주운동 탄압분쇄 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 구속수감, 수감생활 중 단식으로 신장염 투병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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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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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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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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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2.7
(향년 3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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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재학 중 80년 11월경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 민중항쟁 투쟁으로 계승하자” 유인물을 제작, 학내 살포로 연행되어 고문 조사, 그 후유증으로 투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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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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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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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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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1.31
(향년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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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전남대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하던 중 행방불명, 16일 만에 무등산 중봉 근처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어 아직까지 그 죽음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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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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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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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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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5.26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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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서울대에 입학하여 86년 서울대 총학생회 반전반핵 투쟁위원장으로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던 중 김세진 동지와 함께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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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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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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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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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6.19
(향년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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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방위 근무 중 모아둔 삐라를 문제 삼아 경찰이 강제 연행한 후 여천 대미산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위에서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가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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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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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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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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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2.20
(향년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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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서울교대 재학 중 학회 편집부에서 활동하였지만 학내 비민주적 학사운영 및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분노, 항의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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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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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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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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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7.05
(향년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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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연세대 재학 중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경찰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한열 열사의 피격사건으로 학생,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87년 6월 항쟁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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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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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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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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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8.22
(향년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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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대우조선 노동조건 개선을 위하여 동료 노동자와 평화시위 중 직격 최루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망월동 안장을 위해 운구 행렬이 출발하자 경찰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고성의 다리 위에서 시신을 탈취, 남원의 선산에 안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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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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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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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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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3.25
(향년 3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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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후 당시 기독교 농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86~87년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에 참여하였다. 87년 무안읍에서 농민회 회원들과 광주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의 진압 구타에 의하여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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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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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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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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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5.30
(향년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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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로 근무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 대변하는데 앞장서던 동지는 88년 순천 현대교통 근무 중 부당해고에 맞서 분신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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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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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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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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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0.10
(향년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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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생으로 올바른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고민하던 중 88년 군입대를 앞두고 조국통일, 반미자주, 군자주화를 염원하며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절규한 후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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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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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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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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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5.06
(향년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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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민주조선 교지편집장으로, 89년 교지에 <미제침략사>를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수배 중 경찰의 검문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되어 7일만에 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죽음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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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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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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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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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5.16
(향년 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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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9월 노동자 대투쟁 시 현대중공업 사측의 강제진압 중 구사대에서 차량을 전진시켜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이후 1년 8개월의 긴 투병기간 중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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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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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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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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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5.29
(향년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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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박진석 동지의 분신소식을 듣고 회사의 노조분열 책동에 분노하여 대우조선 기숙사 옥상에서 분신 항거하였다. 동료에게 “평소에 분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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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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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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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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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6.04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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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대우조선 사측에서 구사대 가입 강요를 받고 이에 반발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싸움을 유발 시키지 말라” 항의하며 분신, 민주노조사수의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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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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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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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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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6.18
(향년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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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대에 입학하여 잘못된 교육 모순 타파를 염원하며 학내 신문사 활동을 하였으며, 89년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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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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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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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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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5.19
(향년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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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성남 대유공전에 입학하여 민중가요 노래패 ‘어울림’활동을 하였으며, 90년 전대협 출범식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던 중 장성역에서 검문을 피하려다 열차에서 뛰어내려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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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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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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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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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6.06
(향년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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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산업공학과 학생으로 총학생회 예비역 협의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90년 5·18 10주기 기념식 시위도중 과도한 최루가스 흡입 후유증으로 투병 중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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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민족민주
열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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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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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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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1.22
(향년 4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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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으로 검거된 후 옥중에서 광주학살에 항의단식,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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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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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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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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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04.02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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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산대생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강제징집으로 군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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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흑석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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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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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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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3.17
(향년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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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정밀 노동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경찰 구사대에 맞서 분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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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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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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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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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1.14.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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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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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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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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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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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8.15
(향년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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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안기부 기관원에 의해 거문도로 유인된 후 의문사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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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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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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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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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8.07.
(향년 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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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후 노동운동 투신, “미제와 적들의 탄압을 고발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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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민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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