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미술관에서 만나는 한국 남종화의 거장 허백련(許百鍊)의 삶과 예술

■예향(藝鄕), 광주라는 도시 앞에 자주 붙는 수식어다.

전국 어느 곳이나 수많은 예술가가 있고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광주에 붙은 예향이란 단어가 훨씬 더 어울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예술을 이루는 정신이 예술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실제 생활 속에 스며있기 때문 아닐까.
 

의재 허백련.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의재 허백련.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그런 점에서 본다면 광주가 낳은 한국 남종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이야말로 예술과 삶을 하나의 경지로 여겼던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올해로 의재 허백련(1891~1977)이 세상을 떠난 지 45년째, 그동안 네 번이나 강산을 바꾸었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삶과 정신은 여전히 우리 가슴에 남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그림만 그렸던 화가가 아니었다.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사는 것을 먼저라 생각하고 농업 기술학교를 세운 교육자였고, 하늘과 땅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른바 삼애(三愛)사상을 주창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화가이기 앞서 세상의 안녕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궁핍한 민중의 살림살이를 걱정했던 명민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삶과 정신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무등산 기슭 의재 미술관이다.

이곳은 지난 2001년 그의 예술정신과 화업을 기리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곳에 가면 한평생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며 그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정신으로 장하게 살다 간 한 인간의 소박하고 담백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선생의 삶과 예술정신이 녹아있는 의재 미술관과 춘설헌

의재미술관 전경. ⓒ손민두
의재미술관 전경. ⓒ손민두

봄이 무등산 자락까지 치고 올라왔다. 나뭇가지에 달린 새순이며 꽃봉오리가 펑 터질 듯 부풀었다.

봄비 한 번만 맞으면, 햇살 하루만 더 쬐면 ‘쑤욱’하고 고개를 내밀 것만 같다. 그럼에도 아직 남은 약간의 차가움이 살갗에 닿는다.

꽃과 잎이 펑 하고 튀어나오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일 게다. 하지만 물러서는 겨울이 어찌 봄의 기세를 당할 수 있으랴.

추위가 길었던 만큼 겨울의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을 뿐, 훈훈한 봄기운은 마지막 남은 냉기를 누르며 외려 상큼한 차가움으로 코끝을 파고든다.

국립공원 무등산 입구부터 의재 미술관에 이르는 약 1킬로미터의 거리, 산자락과 계곡을 휘감고 내려온 맑고 청정한 공기가 매연에 찌든 폐에 스며들면 한층 정신이 맑아진다.

맑아진 마음으로 진정한 예술인의 삶을 살다 간 선생을 생각하며 산책을 즐기듯 걷다 보면 증심사 계곡 바로 위 비탈진 곳에 자리한 의재 미술관에 다다른다.

의재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화가로서, 교육자로서, 철학자로서 살다 간 선생의 흔적과 예술정신을 건축적 미학으로 구현해 놓았다는 점이다.

여느 미술관과 달리 갤러리로서의 기능보다 한 예술가의 삶과 정신이 강조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미술관 부근에서 창작에 몰두했고, 후진을 양성하고, 깊은 사유에 침잠했으며,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미술관과 가까운 곳에 선생의 묘소도 있으니 미술관 일대는 가히 선생의 모든 것과 만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걸맞게 미술관 건물은 주변 풍경과 어울리며 공존하는 크기와 형태로 조성되었다.

자연 속에 들어앉은 현대적 건물이지만 적당한 크기와 단순한 형태, 소박한 재료와 색상을 통해 주변 풍광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았다.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재료만 가지고 꾸민 단순한 내부는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하듯 여백과 평온함을 창출한다.

미술관의 안팎을 선생의 작품과 삶에 최대한 일치시킨 안목 덕분에 지난 2001년 ‘대한민국건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의재 미술관은 지난해 개관 2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을 마치고 재개관, 요즘 쾌적한 환경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재개관 기념전이었던 ‘문향(聞香)-인연의 향기를 듣다’전은 시민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의재 미술관은 올해 세 차례 소장품전을 통해 관람객과 만난다.

첫 전시는 꽃과 새를 주제로 봄을 알리는 기획전을 개최하며 여름에 시작하는 두 번째 전시에서는 산과 물이 있는 산수화 작품을 선보인다. 가을 전시는 서예와 사군자 등 선비의 고상한 취미를 주제로 기획했다.

지난 3월 4일부터 오는 6월 12일까지 열리는 올해 첫 기획전의 주제는 ‘꽃과 새가 어울린 자리’다.

전시에서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조화(花鳥畵)와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 속 꽃향기와 새소리를 벗 삼아 미술관에서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봄날의 추억을 만들기 좋은 기획이다.

그중 기명절지화에는 선생이 좋아했던 기물들이 화폭에 담겨 있다.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던 동양의 경전을 쓴 두루마리, 즐겨 마셨던 차를 끓이는 화로나 차 주전자 외에 난, 수선화 같은 절지화, 포도, 감, 밤과 같은 과실류 등이 적절히 배치돼 있다.

그러고 보니 선생의 예술세계에서 차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선생은 맑은 정신이 있어야 좋은 그림을 그리고 올바른 생활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차를 마시며 정신과 마음을 늘 맑고 정갈하게 유지했다. 선생이 직접 미술관 뒤편 산록에 밭을 일구어 차를 재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인격 수양을 강조했던 선생의 차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남달랐다. 애써 차나무를 가꾸고 어린잎을 따서 덖고 비벼서 차를 만들어 마시는 과정은 더없이 훌륭한 인격 수련의 과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바라본 자연의 정취를 그림에 담다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선생은 항상 차를 마시고 맑은 하늘처럼 맑고 고요한 마음이 되어야 붓을 잡았다.

그러므로 선생의 그림은 말 없는 자연의 모습 속에서도 어떤 정신과 기운을 발휘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 누구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 이유다.

선생은 우리나라 명산의 사계절을 두루 화폭에 담으면서도 그 실경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마음에 비추어 재구성한 다음 그렸다.

이른바 사의적(寫意的)기법이다. 원경에 산을 두르고 가까이는 한국농촌을 담은 산수화를 그릴 때도 담백하면서도 우아한 정취를 살아나게 했다.

이러한 선생의 독특한 화풍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옛 선비들은 독서와 학문이 부족하면 그림이든 글씨든 선비의 기상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고 경계하면서 학문과 수련에 힘썼다.

 

선생은 한학 공부로 얻은 삼애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차로 얻은 맑은 정신으로 늘 풍경 너머에 있는 자연의 섭리와 삶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림을 다 보았다면 미술관 지척에 있는 춘설헌(春雪軒)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의재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봄눈을 머금고 새순을 틔운 찻잎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춘설헌은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약 30년 간 머물던 조그만 집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을 뿐 아니라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등 찾아온 문인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춘설헌과 가까운 곳에 선생이 세운 농업기술학교 축사로 사용되었던 자리에 지은 문향정, 지인과 학생들을 위해 만든 차실 관풍대가 있다.

모두 자연과 사람을 사랑했던 선생의 철학이 스민, 작고 허름하지만 의미 있는 건물들이다.

예술을 사랑했지만, 그보다 세상의 사랑이란 더 큰 뜻을 품고 실천했던 화가 허백련.

그리하여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도시 광주에 예향의 숨결을 힘껏 불어 넣었다.

미술관 앞 계곡을 휘감고 돌아가는 한 줄기 바람에 봄기운이 실려 온다.

선생의 삼애 정신이 깃든 훈훈한 봄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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