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정신문화의 산실 월봉서원에서 만나는 고봉 기대승

대개 우리나라 큰길엔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의 호나 이름을 붙인다. 충무로는 충무공 이순신, 퇴계로는 퇴계 이황, 율곡로는 율곡 이이, 세종로는 세종대왕의 묘호를 따왔다.

조선 전기 정치·사상가인 고봉 기대승(1527~1572)도 광주 도심지 도로에 그 이름이 붙었다. 광산구 흑석동 네거리부터 월봉서원에 이르는 약 11Km의 도로가 그의 호를 딴 ‘고봉로’다.

나는 그의 학덕은 물론 퇴계 이황의 학문적 성취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반드시 수도 서울의 거리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퇴계로의 반을 나누어 거기에 고봉로란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봉서원 설경. ⓒ광주 광산구청 제공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봉서원 설경. ⓒ광주 광산구청 제공

고봉로는 높은 건물이 빼곡한 도심에서 시작하지만 조금만 달리면 전원적 풍광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하얀 눈이 듬성듬성한 빈 논 사이로 요리조리 굽은 길을 달리다 보면 야트막한 산과 정다운 동네가 벙그는 봄꽃처럼 고운 시선을 보내준다.

어딜 보아도 조용하고 편안하게 서려드는 감상. 자동차와 사람으로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니 이렇게 근사한 풍경을 만났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기대승은 누구인가?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지치주의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한 유학자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를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던 개혁 정치가 중 한사람이었다.

임곡면 소재지를 한쪽에 밀어두고 외곽으로 차고 나가는 길에 접어 들면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과 호남선 철길이 따라붙는다. 잠시 철길과 나란히 달리다 철길 밑을 가로지른 지하차도를 건너면 백우산 자락에 자리한 예스런 동네가 나온다. 고봉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너브실 마을이다. 

■고봉의 꼿꼿한 기상이 서린 빙월

동네에 당도해 서원을 향해 고즈넉한 마을 길을 따라 걸으면 마치 고봉이 살았던 조선시대로 들어온 듯한 고격이 일어난다. 배우고 익혀 나가며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 선현의 숨결이 길가에 흐른다.

예스런 고샅길을 따라 서원 앞에 이른다. 숨죽이며 혹독한 겨울을 나는 초목에 따스한 햇살이 빛난다. 하지만 모든 게 얼어붙어 미동도 하지 않은 느낌이다. 옛 선비들이 그랬다. 마음에 중심이 서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결과 격이 있었다.

이치를 깨닫고 익힌 바를 실천하려한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원 안으로 들어섰다.

서원은 강당인 빙월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앉혔고, 그 위로 내삼문인 정안문을 세웠다. 선생의 위패는 맨 위 숭덕사에 모셨다. 예의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모범답안을 따랐다.

월봉서원. ⓒ광주 광산구청 제공
월봉서원. ⓒ광주 광산구청 제공

그러나 월봉서원은 빙월당과 장판각 두 동의 건물만 ‘광주시지정문화제’로 등록되었을 뿐,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처럼 역사·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서원 건축물이 모두 최근에 지어졌기 때문인데, 살펴보면 고봉의 신산한 삶을 닮은 월봉서원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관계가 있다.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 만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지금의 신룡동 낙암 아래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그 후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광산구 산월동 동천으로 옮기고 나서 효종으로부터 월봉이란 이름을 사액(賜額)받아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 시기인 1868년 전국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다. 그 후 1941년 그를 기리는 후학들에 의해 고봉의 묘소가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겨 빙월당이 지어진 다음 198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니까 월봉서원은 조선 후기 혹독한 전란과 정치적 풍상을 겪고 장소를 옮겨가며 어렵사리 그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러니 월봉서원의 답사는 무엇보다도 고봉 선생의 삶과 사상을 기리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참뜻이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건물도 풍광도 선생과 직접 관련된 것이 없는 이곳에 우리가 새겨갈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광주 광산구청 제공
ⓒ광주 광산구청 제공

하긴 문화재 탐방의 목적이 유형의 자산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무형의 정신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텅 빈 빙월당 뜰 안에서도 안빈낙도를 추구하며 경국제세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선생의 마음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정 아쉽다면 서원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면 된다. 때마침 빙월당 처마 끝 바다처럼 푸른 하늘에서 얼음장 같은 낮달이 떠오른다. 빙월당이 제 이름에 값하는 순간이다.

개혁군주 정조는 고봉의 학덕과 인품을 숭앙하며 빙심설월(氷心雪月)이란 휘호를 내렸다. 선생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눈 위에 비치는 달빛과 같다는 뜻인데, 서원의 강당 빙월당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데 이것은 고봉이 세상을 떠난 200년 후의 일이다. 당대 사람들은 낮달의 밝음을 알아채지 못하듯 그의 경륜과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재기와 패기로 뭉친 소장학자 정도로만 인식했을 뿐이다.

■빙월당 처마에 걸린 낮달

ⓒ광주 광산구청 제공
ⓒ광주 광산구청 제공

고봉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다.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신출내기 선비 고봉은 성리학으로 일가를 이룬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와 사상논쟁으로 맞짱을 뜬다. 이때 두 사람의 나이차는 무려 스물여섯, 웬만한 내공이 없고서야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고봉은 이미 주자대전 백여 권을 섭렵한 패기만만한 선비였다.

토론의 주제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사단칠정론’이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한 것인데 퇴계는 주자의 학설에 따라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봉은 여기에 문제제기를 했다. ‘인의예지’는 ‘희로애락애오욕’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인데 어찌 사단과 칠정이 따로 일 수 있느냐는 거였다.

고봉과 퇴계는 이 문제로 장장 8년에 걸친 왕복서한을 통해 끝없이 논쟁을 이어갔다. 결국 고봉의 깊은 통찰과 식견은 퇴계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퇴계가 고봉의 사려 깊은 연구를 받아들여 기존 주장을 수정했다.

사단과 칠정은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이른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창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퇴계는 고봉과의 토론을 통해 유학의 이론보완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다. 즉 중국의 주자보다 더 진보된 학설을 내놓음으로써 동양 철학사에 퇴계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된 것이다.

ⓒ광주 광산구청 제공
ⓒ광주 광산구청 제공
ⓒ광주 광산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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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과 퇴계가 벌인 사상논쟁은 그 논쟁의 결과는 물론 논쟁의 방식과 태도에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특히 요즘 들어 거친 언어가 오가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치열하면서도 차분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정중한 토론을 이어갔던 두 석학의 인간됨은 후대의 귀감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퇴계를 동양 최고의 사상가로 우뚝 서게 한 일등공신은 바로 고봉 기대승이란 점이다. 아무리 당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퇴계였을지라도 고봉과의 치열한 토론이 없었다면 과연 학문적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해와 함께 뜬 달의 밝음을 알아보지 못하듯 퇴계는 알아도 고봉은 잘 모른다. 우리에게 고봉은 바로 그런 존재다. 고봉은 오로지 학자적 양심으로 학문적 정의를 위해 자신의 의지와 기개를 드러냈던 당대 보기 드문 선비였다.

아까 빙월당 처마 끝에 있던 달이 어느새 중천에 떴다. 한데 달은 더 외롭고 하늘은 여전히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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