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흠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문학들 刊)를 펴냈다. 가을밤 책장을 넘기는 시인의 귀에 들려주는 귀뚜라미의 애절한 노래를 두고 시인은 “무심에 파르라니 떠는 페이지를/어디에 숨어서 읽고 있나”라고 표현했다. 일상 속에서 얻은 느낌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시적으로 승화해 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이런 시구는 어떤가. “일하다 무릎을 다쳐 누웠는데/지구의 공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낯선 별들이 떠 있는 우주 한가운데/들깨 알처럼 작은 내가/떠 있는 것 같다”(「귀가 운다」)

김황흠 시인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표지 그림. ⓒ문학들 제공
김황흠 시인의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표지 그림. ⓒ문학들 제공

세상 앞에서 공손한 삶의 태도가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심상이다. “우주 한가운데/들깨 알처럼 작은 내가”라는 구절도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표현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김 시인은 전남 화순과 나주를 가로질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드들강변에 산다. 그에게 농촌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그에게 드들강변은 일터이며 산책로다. 그는 물둑 섬 가에 줄지어 선 쇠백로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날마다 강변을 돌아다니는 내게/뭔 일 있냐고 묻는 것 같고” “더 있으면/쇄백로의 물음표가 더 굽어질 것만 같아/대답을 하지 못하고 물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심성의 소유자다.

“이마를 쪼아 버릴 듯 벼슬을 흔들어” 대는 ‘맨드라미 수탉’, “길 모퉁이 자전거에” “한 말짜리 탁배기 통을 싣고/비틀비틀 오고 있는 양 씨”, 이런 풍경들은 시인에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것이다. 소나기가 내려 방방하게 차오른 물을 보고 수채를 터주는 시인의 일상을 보자.

“수챗구멍이 막혀 방방하게 차오른다 허겁지겁 달려가 수채를 빼 주자 탁 터진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환성을 지으면서//개밥바라기가 현관 모서리에서 깜박깜박 조는데”(「소나기 한 편」)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개밥바라기가 현관 모서리에서 깜박깜박 조는데”라는 구절에 이르면 김 시인의 딴청부리기가 얼마나 능숙한지 감탄하게 된다. 청양고추를 골라내다 만난 푸른 벌레 한 마리를 ‘쐐기 스님’이라 부른 시인은 “매운 거기가/동안거에 들기 딱 좋은 곳”이라고 노래한다. 널어놓은 고추에 내리쬐는 햇살을 ‘햇살 망치질’이라고 한 표현은 또 얼마나 경쾌한가.

드들강변과 그곳에 깃든 농촌에서 겸손한 자세로 사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김 시인의 시를 두고 이대흠 시인은 “풀여치 시인의 풀잎 노래”라고 이름 붙였다.

김황흠 시인.
김황흠 시인.

“김황흠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물과의 빈번한 의사소통도 실은 시적 화자의 극심한 외로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시적 화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존재 증명 방식이 노래이다. 끼루끼루끼루 소리를 내는 풀여치의 노래는 실제로 들어 보아도 어떤 구조 신호처럼 보인다. 여리고 투명한 날개로 마른 풀잎 같은 노래를 쉴 새 없이 부른다. 이렇게 힘없고 외롭고 쓸쓸한 풀여치의 무대는 중앙도 아니고, 높은 데도 아니다. 풀여치는 어느 스산해 가는 계절의 모퉁이에서 제 깜냥껏 최선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 풀여치 같은 시인이 김황흠 시인이다.”(이대흠 시인, 시집 해설)

김 시인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2008년 『작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해 시집으로 『숫눈』, 『건너가는 시간』, 시화집으로 『드들강 편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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