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간채 전남대학교 명예교수(광주연구소 이사장)
이승을 떠나신 송기숙 님의 영전에 삼가 추모인사 올립니다.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도 하나라는 말이 있지만, 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이 마음이 이토록 감당하기 어렵게 출렁이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가시는 그 길이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먼 여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 지난 날 우리에게 남겨주신 몇 가닥 기억의 줄거리를 되돌아보며 아쉬운 고별의 인사를 나누려 합니다.
서울로 이거하시기 전인 재작년 여름날 화순 한골마을 자택에서 침상에 누워계시던 선생님 모습이 한 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씀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맑고 그윽한 눈빛에 담아 보내주신 그 연민과 우정을 생각합니다. 후학을 향한 깊은 사랑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보다 두해 전 댁으로 찾아갔을 때, 큰 얼굴에 가득한 미소로 반겨하시면서 같은 질문을 거듭거듭 반복하시는 모습이 주었던 아픔과 슬픔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선생님과 함께 했던 기억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활동의 현장에서는 참으로 아름답고 값진 기억들을 남겨주셨습니다. 1980년대 년 말 무렵이었습니다. 분노와 열정으로 뜨거워진 맥주홀에서 처음 보는 시민주객이 맥주상자를 들고 와서 ‘광주시민이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며 전해주던 날,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대취했었습니다.
영호남 교수들이 지리산에 모여 시국을 염려하며 서로 우의를 다질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밤늦게 산에 도착하신 후, 젊은 교수 몇 사람을 별방으로 부르더니 품속에서 돈다발을 꺼내 전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서울 아무개가 주었는데 젊은 교수들이 활동하는데 보태 쓰라고. 그 산채에서 박현채 선생님과 마주앉은 님의 모습도 대장군들의 만남으로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슴조이며 들었던 이야기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준비하시던 일화였습니다. 유신의 만행이 막바지에 이른 최악의 시기에 정권의 심장을 겨눈 이 싸움을 이끌어 오시면서, 함께 해야 할 광주 교수와 서울 교수 사이를 오가면서, 당신이 감당해야 했던 차가운 고독, 참담한 오해, 그리고 마침내 진실이 드러나는 역사의 역설을 알게 되었었지요.
선생님이 살아오신 세상은 거센 파도 휘몰아 친 우리의 현대사였습니다. 고난의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전후의 소용돌이,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남북분단과 비극의 한국전쟁, 야만의 권력에 마주섰던 민주화투쟁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속에서 선생님이 실천했던 삶은 정직하고 진실한 교사로 시작해서, 반민주 폭압의 국가권력에 맞선 강철 투사의 세월을 거쳐, 이를 예술로 재구성해낸 작가로 마무리한 여정이었습니다.
교사였지만 또한 투사이며 작가였던 이 삶의 행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 그 삶의 뿌리에 담긴 진실은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에 대한 농민 저항의 싸움 <암태도>, 동학 농민혁명의 대하소설 <녹두장군>, 그리고 5.18광주항쟁을 그린 <오월의 미소>로 집약되어 흐르는 정의를 위한 투쟁과 민족사랑의 강물을 봅니다.
그리고 이 현대사의 기록은 천여 년 전 완도 청해진의 장보고, 그 뒤를 이은 진도 삼별초의 대몽항쟁, 500년 전 호남의병에서 연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의 바다에 이른 선생님의 삶과 그 삶속에 녹아있는 정신이 살아남아 있는 우리의 가슴에 별이 되어 빛나기를 기리면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고별인사를 올립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2021년 12월 7일
나 간채 (전남대 명예교수, 광주연구소 이사장)
故 송기숙(宋基淑) 교수님 약력 (1935.7.4.~2021.12.5) 1935 7. 4. (음력) 1989. 3. 15 성명서 ⌜현대 노동자들의 생존권 확보 투쟁을 지지하며⌟ 발표 주도 2000. 8. 31 전남대 교수직 정년퇴임 ** 고 송기숙 교수님 대표 소설 「어떤 완충지대」(1968), 「백의민족」(1969), 「휴전선 소식」(1971), 「사모곡 A단조」(1971), 「어느 해 봄」(1972), 「지리산의 총각샘」(1973)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