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만에 정희승 개인전 '나는 너다'
3일부터 11월29일까지 오월미술관

불온한 시대를 통과하던 중심에 ‘불로동 시절’이 있었다. 불로동은 광주미술의 발화였던 동시에 기폭으로 기억 속에 존재한다. 작가를 처음 만난 곳도 불로동 적산 가옥에서였다. 나무계단을 오를 때 들리던 삐걱, 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명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사라진 얼굴에는 주름살이 생기고, 귀밑머리는 희끗했다, 열정에 찼던 말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줄어 보였다.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변하지 않은 것은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개안과 그림이란 자기만의 언어로 멈추지 않은 사회적 발언이었다. 우리는 변한다. 시간적 물리적 공간과 더불어 시대적 상황이 모든 것에서 변화를 가속한다.

작가가 세상을 향한 발언을 시작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사회를 읽는 눈이 터지기도 전에 부조리한 세상의 중심에 던져졌고 자신의 역할을 정립하기도 전에 직립으로 세워졌다.

고교 시절 작가를 관통한 오월항쟁은 심장에 붉은 상흔을 남겼고, 시대는 작가에게 앞서서 나아가기를 요구했다. 세상의 눈을 가졌을 때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이하 광미공) 회장으로 미술이 갖는 사회적 역할을 깃발로 해냈다.

광미공의 발전적 해체 후에도 작가는 여전히 부조리한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고, 선배와 후배들을 챙겼다. 작은 들꽃에 눈길을 주고 세상의 폭력과 부조리에 맞서 자신이 선택한 그림이란 언어로 목소리를 냈다.

전시주제인 『나는 너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담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 결과가 이번 전시를 있게 했다. 세상의 중심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운용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라지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무(無)일 뿐이다. 상대를 인식할 때, 나를 돌아볼 수 있으며 나를 적나라하게 해부할 때 상대도 거짓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결국 『나는 너다』는 스스로 성찰을 요구하는 작가의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지시어이면서 발언이다.

일곱 개의 눈 그리고 참담함과 희망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이번 전시에서는 모두 50여 점의 작품이 선보인다. 도록에는 과거의 작품도 담았다. 대부분이 2015년 이후의 작품이다. 『나는 너다』는 공통적 주제를 담고 있는 50여 점의 작품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이지 않은 가느다란 실타래로 묶고, 묶여있음을 알 수 있다.

등이 붙어서 영원히 마주 볼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각기 다른 얼굴과 표정이지만 결국은 한 몸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네 얼굴 속에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내 몸짓을 통해 너를 읽을 수 있다는 성찰의 주제가 분명하다.

50여 점은 일곱 가지의 또 다른 소주제로 분류된다. 그 첫 번째는_ ‘광장’, ‘빛-스미다’, ‘문 앞에 어둠’이다. 작가는 이 작업들 속에서 현재의 자신에 대한 참담함,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그렇지만 버릴 수 없는 빛의 형상이었던 그 무엇에 대한 절망과 반대로 갈망, 희망을 갈구한다. 자신을 관통했던 무엇, 생의 찰라의 순간에 온 마음을 앗아갔던 그 무엇에 대한 현재의 자신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두 번째는_ 이 전시를 직시하게 한 전언(傳言)같은 물음표이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보내는 말, 살아생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죽어서라도 부탁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전언은 매우 불안하며 내밀하고 차갑다.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욕망, 나의 얼굴이자 곧 너의 얼굴인 ‘자화상’이 있다. 두려움으로 눈물이 곧 쏟아질 것 같은 시리아 난민 어린이 ‘후데아’와 죽어서 비로소 육지에 다다른 시리아 난민 어린이 ‘알란 쿠르디’는 동시대의 자본 논리와 인간 앞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와 생명 외에 더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돌아보게 한다.

세월호 희생자인 ‘윤희의 신발’과 ‘교복-늦은 귀가’ 역시 같은 맥락으로 작가의 발언은 주지를 상기시킨다. 이들 역시 죽어서 배를 탈출하고 육지에 오른 우리의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말을 건 이 작품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이지 않은 권력과 그 무엇이 앗아간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붉은 전언을 발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세 번째는_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나는 너다』이다. 동시대를 함께한 동지와 후배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투시한다. 물론 그들의 행동과 모습 안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가장 단순한 화제이면서 가장 무겁고 중량감 있는 대상을 선택한 이유이다.

네 번째는_ 작가가 고등학교 재학 중에 맞닥트린 오월항쟁에 대한 기억의 편린이다. 작가는 청년 시절을 길 위에서 보냈다. 길 위에서 오월항쟁을 알리려 온몸으로 발화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품고 있으며 희망의 대동세상을 화폭 가득 푸른빛으로 채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단지 기억 속으로 흘러가는 오월항쟁의 휘발을 ‘창’을 통해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것을 잊지 않는다. 기억을 흘러내리는 빛으로 수직 표현한 버스 안, 사람들의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앞과 옆을 보아도 오월항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선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처럼 오월항쟁을 표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 아픈 질문을 던진다.

다섯 번째는_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현대의 부조리에 대한 궁극의 발언이기도 하다.

‘유품-흐르는 육개장’은 희망이었다가 죽음으로 변환되는 청년의 삶을 극명하게 색(color)로 보여준다. 흐렸다가 찬란해지고 결국은 검은 빛으로 탄화해 가는 과정은 삶의 과정이라기보다 고통과 비애를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유분 많은 물감이 대체한다. 살기 위해서 먹을 육개장이 결국은 죽음과 절망의 꼭지점이 되었다.

작가는 이 절망을 놓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삶의 과정과 사라져버린 비정규직의 죽음을 육개장 하나로 조형해낸다. 노란빛을 주조로 천착한 ‘황사’ 역시 시대의 불확실성에 대해 육개장 아닌 육개장의 언어를 대신한다. 더는 멈출 수 없으나 나아갈 수도 없는 시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숨도 쉴 수 없는 황사 그득한 공기 속 산소를 흡입하며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황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걷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여섯 번째는_ 30년이 훌쩍 넘은 오월항쟁 연작이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불로동 시절’을 작업 안으로 끌어들인 불로동 풍경과 목판 작업으로 판화 세상을 열던 시기의 작업 결과물이다.

눈 내리는 ‘불로동’은 춥고 스산하다. 자전거를 타고 눈길 위를 지나던 위태함, 우산을 쓰고 눈을 맞으며 길을 걷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수한 집들 사이로 창가에 안온한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은 눈 내리는 불로동 풍경이다.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불로동 다리’, 국가 폭력이 점철된 엄혹한 시절 속에서 그즈음 어디쯤 있었을 주점 풍경인 ‘한잔’ 그리고 ‘천변 풍경’ 속에서 극명의 희망을 발골하고 반추한다.

가장 열정적으로 삶을 지탱하고 목판화 시대를 열었던 ‘포장마차에서’와 ‘김씨의 초상’, ‘짐을 진 남자’, ‘목판화 삼인전’ 등은 작가의 섬세한 칼맛을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이 칼맛은 광미공창작단의 ‘광주민중항쟁 연작판화’로 이어져 ‘핏빛 오월’과 ‘하얀기억 천호’와 ‘다시 이 거리에 서면’으로 엄혹한 시대의 대표작으로 거듭난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_ 작가는 그래도 작업 안에 인간의 절대적 의지인 희망을 놓지 않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에게’ 사월의 분홍 진달래꽃을 선물하고, 지하도의 걸인에게 ‘만추’의 노란 은행잎을 바구니 안에 희망으로 선물하며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라고 물음을 던진다. 또, 있다.

아직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때, 해맑기만 한 작가의 어린 시절을 그린 ‘순금의 기억-유년의 시대’와 ‘서우’, ‘지원’이다. 그 무엇에도 때 묻지 않은 유년의 기억 속 작가는 ‘서우’, ‘지원’과 동의어이자 마침내 『나는 너다』이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정희승 작가

도록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작가의 옆 모습은 슬프다 못해 참담하다. 작가는 “예술가에게 ‘영감이 스미는 순간’과 외부의 자극으로 인한 ‘각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으나 그 과정까지 오는 동안, 휘몰아쳤을 작가의 내면은 광풍이었을 것이다.

태어났음의 천형(天刑)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정수리를 내리꽂는 물줄기 같은 빛의 꽂힘을 어떻게 설명하고 받아들일까. 살아오는 동안 내내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무엇. 삶의 원동력이자 목적이었던 무엇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훌쩍 넘어 이순(耳順)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게 한다.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은 채 건너온 지천명에 하늘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한, 뜻을 깨달았고 이순에 이르러 세상 만물의 모든 것과의 욕망과 경계를 가졌다. 욕망도 욕구도 그저 오고 갈 뿐, 비교할 무엇과도 거추장스러운 것은 없다. 거리낌 없는 발언과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로 화폭을 채워간다.

이른 새벽 한 송이 붉은 동백을 두 손 가득 안고 다시 살아갈 희망을 세운다. 우리 모두 ‘아침 꽃을 줍다’처럼 꽃 한 송이 마음 안에 채워야 할 때가 왔다.

작가의 12년 만의 전시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작가의 붓은 여전히 세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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