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감독의 전 작품은 아니더라도 연속된 몇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는 경향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크리스티안 페촐드 감독의 ‘피닉스’, ‘트랜짓’, ‘운디네’의 관계성을 통해 감독의 철학을 이해해본다.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크리스티안 페촐드(Christian Petzold) 감독이 <운디네>(2020)와 <트랜짓>(2018)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어느 영상메시지에서 한 말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닌 관념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시대와 국경을 가로질러 누구에게나 공감을 살 수 있는 관념이 무엇일까 질문해본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집착을 동반한 사랑'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피닉스>(2014), <트랜짓>, <운디네>에서 보여주는 집착의 결과만 나열해본다면 '집착'은 파멸을 초래하는 듯하다. 한 여자는 말없이 남자의 곁을 떠났고, 다른 여자는 남자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며, 또 다른 여자는 남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도 끊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결과보다 집착의 과정에 더 무게를 싣고 싶다.

'피닉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영화 '피닉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피닉스>의 ‘넬리’(니나 호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로 얼굴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어 안면 수술을 감행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복권’하느냐 ‘재건’하느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넬리’는 자신의 얼굴을 새롭게 ‘재건’이 아닌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복권’시키길 바란다.

그녀는 나치로 인해 사라져버린 과거로의 회귀를 욕망하며 거기에는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필드)에 대한 집착이 뒤따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니’는 부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넬리’는 그가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곁에 머물기로 하고 그녀의 유산을 얻기 위해 아내인 척 연기를 해달라는 어이없는 부탁까지 들어준다. 

그녀의 꾸며진 외면만 보고 진짜 내면은 보지 못한 ‘조니’는 그녀의 팔 안쪽 깊숙이 감춰진 수감번호 문신을 발견하고는 그간 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한다. 그러나 ‘넬리’의 마음은 그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다.

영화 '트랜짓', 엠엔엠인터네셔널 제공
영화 '트랜짓'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트랜짓>의 ‘마리’(폴라 비어)는 나치로부터 도망친 난민들이 모여있는 항구도시에서 부유하는 인물이다. 스스로 남편의 곁을 떠났지만 그를 잊지 못해 도시를 배회하며 애타게 남편을 찾는다.

대신 이 영화의 제목인 ‘트랜짓’(transit, 수송, 경유, 환승)의 의미처럼 남편을 찾기 위해 다른 남자를 곁에 두고 의지한다. 필요하다면 잠자리도 허락한다. 이런 그녀에게 ‘게오르크(프란츠 로고브스키)는 남편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인 환승구인 것이다.

각종 죄책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랑을 택한 ‘게오르크’. 그의 진심을 극구 거절한 그녀는 그를 두고 도시를 떠나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후 홀로 남겨진 ‘게오르크’의 눈앞에는 여전히 도시를 배회하는 ‘마리’의 형상이 선연하게 보인다.

죽어서도 아픔의 장소를 떠나지 못한 그녀의 혼에 '게오르크'는 혼란스럽다. ‘마리’가 남편에게 보여줬던 ‘집착’은 이제 ‘게오르크’에게로 전이된 셈이다.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를 남편을 애타게 찾았듯이 이제 그도 그녀를 애타게 찾는다.

영화 '운디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영화 '운디네' 스틸컷. ⓒ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마리’역의 폴라 비어와 ‘게오르크’역의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이후의 작품 <운디네>에서 한번 더 재회한다. 이 영화에서의 집착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어느 날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운디네’(폴라 비어)는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브스키)를 만나 뜨거운 연애를 이어가지만 우연히 길에서 전 연인을 마주치면서 본심을 들킨다. 진실이 표면 위로 떠오른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헤어진 전 연인을 대체할 물리적 관계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크리스토프’는 안타까운 사고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운디네’는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결국 전 연인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속죄를 대신한다.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린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찾지만 <트랜짓>의 '게오르크'가 그랬듯 이미 죽고 사라진 그녀의 영혼만 마주한다. '운디네'는 이제 기억해야할 역사의 일부분이 된 셈이다.

영화 '피닉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영화 '피닉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집착하는 사랑의 숭고함을 이야기하려는 걸까?'

짐작컨대 슬픈 사랑 이야기들은 아픈 역사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암시하는 일종의 알레고리다. <피닉스>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 더미를 통해, <트랜짓>에서는 끊임없이 항구도시를 배회하는 ‘마리’를 통해, <운디네>에서는 시종일관 등장하는 베를린 도시개발의 역사를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지나간 연인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페촐드 감독이 이야기하는 집착은 아름다운 집착이며 현재 우리 도시의 곳곳에서 발견된 역사의 상흔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혼을 기억할 것을 당부하는 것만 같다.

아우슈비츠,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의 5.18 항쟁이라는 아픈 역사의 흔적들도 발전하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들로 인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점차 흐릿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는 우리가 알고자 할 때 그 섬광을 뿜어내며 우리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기억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사실을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깨닫게 된다.

영화 '운디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영화 '운디네' 스틸컷. ⓒ엠엔엠인터네셔널(주) 제공

한편 크리스티안 페촐드 감독의 <피닉스>, <트랜짓>, <운디네>를 비롯해 <내가 속한 나라>(2000), <옐라>(2007), <열망>(2008), <바바라>(2012)는 10월 15일부터 31일까지 광주극장 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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