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을 1인분의 삶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주인공 진아는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소파와 TV가 놓여있어야 할 거실은 텅 빈 채로 쓰레기봉투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편의점 도시락과 즉석식품으로 저녁을 먹는 그녀에게 주방 역시 의미가 없는 공간이다.

이 아파트에서 의미 있는 공간은 오직 방 하나, 정확히 말해 침대 위 공간이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TV를 보고, 식사까지 해결한다. 진아는 철저히 혼자이며, 또한 철저히 혼자이기를 원한다. 집 밖으로 나갈 때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한다. 그녀가 가는 유일한 식당은 무인주문 시스템으로 음식을 주문해서 혼자 먹을 수 있는 식당이다. 진아는 일렬로 앉는 긴 테이블에서 먹방을 보며 점심을 먹는다.

 

그녀의 직업은 카드회사 콜센터 상담원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혼자이기를 원하는 진아에게 최적인 직업이다. 일터는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고, 업무 중에는 헤드폰을 착용하니 직장 동료와 엮이는 일도 없다.

그녀가 상담 업무 중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정말 죄송합니다”와 “정말 감사합니다”이다. 그러나 이 멘트에는 무표정한 진아의 얼굴처럼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정말”이라는 단어가 수식해야 할 미안함과 고마움은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미리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입력된 음성을 재생하는 자동응답기처럼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상태로 고객의 전화를 받게 되면 수월한 고객도, 막말을 하는 진상 고객도 존재하지 않는다. 3분 안에 상담을 마치는 진아에게 모든 고객은 똑같은 존재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덕분에 그녀는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엄마의 장례식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모친상을 치르고도 가장 우수한 실적을 올린 직원이다. 최고 실적을 올린 그녀는 신입사원 수진의 교육을 떠맡게 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진을 무시와 무관심으로 대한다.

 

수진은 “감정 섞고 진심 섞어” 고객을 대한다. 기계처럼 매뉴얼대로 응답하는 진아와 달리 수진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감정을 배제하며 고객을 대하는 법을 배우는 와중에 시간여행을 계획하는 “정신이상자”의 전화를 받게 된다. 2002년 월드컵 때 서로 어깨동무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들은 수진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감정 없는 기계가 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말 것을 요구받는 이 세계는 그녀에게 너무도 견디기 힘든 곳이다.

“사람은 기계보다 훨씬 더 깨지기 쉽다. (…) 인간은 편의대로 실컷 쓰면 되는 기술이나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테플론으로 나 자신이나 서로를 코팅한다고 해도, 그 코팅 갑옷 아래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견디라고 시킨 일을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모르텐 알베크, <삶으로서의 일>)

진아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웃과 동료,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독립한 그녀는 엄마를 보러 가는 대신에 홈캠을 설치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진아는 그날 아침까지 마주쳤던 옆집 남자가 한참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옆집 남자는 자신에게 인사 한번 안 해준 진아에게는 자꾸 보이는데, 바로 그의 죽음이 진아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며, 그녀의 이웃이 옆집에서 악취가 난다고 신고를 한 뒤에야 부패된 육신으로 발견될 것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나의 유한성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그러나 한갓 세인들에게 죽음이란 ‘자유의 사건’이 아니라 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짐이며, 기껏해야 ‘귀신의 시간’일 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목격해버린 진아가 이전처럼 혼자만의 삶에 몰두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혼자 있는 것을 잊게 했던 TV는 새로운 옆집 남자 상훈의 이사 이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신입사원 수진이 회사에 결근한 날, 진아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혼밥이 어려워지고, 수진에게만 들렸던 통화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들리는 통화연결음 소리는 그녀가 기계처럼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무실을 뛰쳐나온 진아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전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리자 뭐가 그리 즐겁고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냐면서 자신과 엄마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바람 나서 집 나간” 아버지가 엄마의 전 재산을 독차지할 때도 감췄던 감정들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다. 그녀는 아직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패를 경험하고 집으로 향한 그녀는 죽은 옆집 남자를 위한 제사를 목격한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망자에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히 가세요. 좋은 데 가세요.” 그녀는 죽은 사람과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 건네는 진심 어린 작별인사를 보게 된다.

그녀는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사실 자신은 혼자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제대로 된 작별인사가 하고 싶다고 말한다. “수진씨, 잘 가요.”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한다.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TV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던 진아는 TV를 끄고 잠을 청한다. 팀장에게 휴직을 신청하면서 같이 밥을 먹자고 제안한다. 항상 스마트폰에 고정되었던 시선은 버스 밖 풍경을 향하고, 그녀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녀는 영화 마지막까지 혼자로 남지만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슴도치들이 추위 속에서 가시에 찔려가며 서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안전한 간격을 찾아내는 것처럼, 같이 밥 먹자는 말에 “뻥 치지 마”라고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언젠가 따스한 간격을 발견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진아의 아버지는 외로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는 교회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춤을 배우고, 아파서 병원에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타인과 함께하기를 갈망한다. 외로움은 타인을 욕망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슬픔이다. 그 슬픔은 혼자 있는 시간을 고통으로 만든다.

 

그러나 혼자 있다는 것과 외롭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항상 친구들로 가득한 이에게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이가 항상 외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곁에 두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존재는 나만의 것이기에 우리는 모두 홀로 있다. 외롭고 불행한 삶은 홀로 있는 시간, 즉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다. 우리 자신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를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외로움이 아니라 너무 미미한 고독일지도 모른다. (…) 외로움 속에서는 자기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인 반면, 고독 속에서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진아는 아버지에게 홈캠으로 자주 들여다 보겠다며 딱 그렇게까지만 지내자고 말한다. 그녀의 휑한 거실에 소파가 놓일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갈 1인분의 삶은 혼자라도 꽤 괜찮은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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