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열사 부친 고 박심배 아버지께

삼띠를 두른 검정 상복 차림의 선경이. 30년전 5월 아빠다.

5만 광주시민 앞 금남로 옛 도청앞 분수대 단상 위~
딸을 잃은 슬픔에 힘없이 고개 푹 떨구고 서 있던 40대 후반의 중년남자. 오늘 그 아버지를 보내는 또 한 남성. 키도 얼굴도 눈빛도 표정도 차림새도

영락없이 그날의 아빠다.
누군가의 죽음은 늘, 흩어져있던 많은 이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장례식 기간 내내 내 기억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1990년 대학 1학년. 세희와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전남대 용봉편집실.
2021년 여름. 20대에 헤어져버린 사람들. 50대에 다시 조우했다.

고 박심배 선생이 생전에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묘지)에서 개최된 딸 박승희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는 모습.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제공
고 박심배 선생이 생전에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묘지)에서 개최된 딸 박승희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는 모습.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제공

기미와 주름살 조금씩 쳐진 뱃살로 옷을 갈아입었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멋있었던 건이형, 엄마처럼 넉넉했던 은희언니, 미녀였던 세화언니, 착하기만 해서 우리딴엔 승희 밥이라 불렀던 학기.

그때가 좋았다. 마냥 행복했다.
가고 싶다. 시간을 되돌려 1991년 이전 그 철부지 젊은 청춘 그때로.

목포 촌년들이 풍운의 꿈을 안고 광주로 대학을 왔다.

1989년 고3. 전교조 투쟁으로 집에서 학교에서 핍박 아닌 핍박으로 숨이 콱콱 막혀있던 우리에게 광주는, 가슴벅찬 해방구였다. 누가 뒤쳐질세라 앞다퉈 운동권 조직에 몸들을 실었다.

무조건 학생운동에 몸을 담자며 결의하고 시시때때로 자췻방에 모여 서로의 조직? 상황을 공유했고, 매시기 투쟁의 내용과 시국 전망을 나름 논의하며 마지막엔 늘 변치말자 맹세하고 술한잔을 들이켰던 1년이었다.

이제 막 고딩 때를 벗은 같잖은 애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함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다.

그러나 어쨌든 그날의 우리는 진심 그랬다.

진심 그렇게 대학 1년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승희는 ‘친구들아 슬퍼하며 울고있지만은 말아라’는 유서를 남긴채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날 이후 우리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우리들의 시국논쟁은 수서비리 사건이 마지막이 되었고 낄낄거리며 술잔 기울였던 만남은 광주 말바우 우산동 언덕 위 점집 가득했던 골목. 코딱지만 했던 은희 언니 자취방이 마지막이었다. 라면에 소줏잔 기울렸던 1991년 4월 어느 밤이었다.

30여년의 유수한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지금껏 승희의 아버지를 단 한번도 ‘아버지’라 부른적이 없다. '아빠'라 불렀다. 통화를 할 때 아빠 또한 내게 늘 첫마디가 ‘내딸이냐? 아빠다’ 였다. 평범한 아저씨였던 아빤 그날 이후 민주투사가 되셨다 .

세상을 함께 논하는 동지가 되었다. 때론 어떤 사안에 의견이 달라 ‘아빠 난 그렇게 생각안해요. 그건 아닌거 같아!’ 감히 대(?)들기도 했다. 그래도 아빤 늘 인자했다. 마지막엔 또 늘 허허 웃음으로 마감하셨다. ‘오냐 내딸 아빠가 잘 알았다. 우리 딸 언제 보냐?’ 였다.

생각해보니 아빤 참 많은 이들을 진심 자식으로 생각하셨다.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때도 늘 ‘우리 00’라 호칭하셨다. ‘우리 갑석이, 우리 진환이, 우리 창규....’

큰애가 올해로 스물세살이다. 철없는 짓 펑펑 해대고 때론 땅 꺼지듯 실망감이 생기고 때론 쥐어패고 싶을 정도로 밉다가도, 돌아서면 어찌 그리 이쁘고 또 이쁜지 고슴도치도 내새끼가 맞다 하겠다.

이런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운명을 다했다? 아마도 나 같으면  솔직히 못살 듯 싶다. 아니 살아있다면 아마도 정신이상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대엔 친구를 잃은 슬픔 뿐이었으나, 50줄이 되니 20년 키운 자식을 잃은 슬픔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아빠의 건강이 위독해질 쯤~ 주위 수많은 이들이 ‘승희열사 곁으로 아버지가 이젠 가실려나 보다’ 했다.

2007년 2월 고 박심배 선생이 생전에 부인 이영순 님과 함께 전남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딸 박승희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받고 있다.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제공
2007년 2월 고 박심배 선생이 생전에 부인 이영순 님과 함께 전남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딸 박승희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받고 있다.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제공

난 왜인지 오로지 한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승희야. 아빠 만나면 진짜 잘 모셔라...버선발로 제일 먼저 마중 나오고 두둥실 헹가레를 해드려야 하고 하루종일 업고 노래불러 드려라..꼭 그래라..’

지난 7월11~12일 무주리조트에서 세희 등 친구들과 만나 학창시절 이야기 나누며 즐겁게 놀았다. 피곤한 몸을 끌고 덕유산 자락을 넘어오던 12일 오후. 승희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상태가 위급해지셔 1인실로 옮길거라며 막 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1인실이란 임종을 준비하는 방과 다름없기에, 얼른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형들에게 문자를 띄웠다.

광주까지 오는 내내 언니와 선경이와 형들과 쉼없이 통화하느라 시간이 다 흘러간 듯 하다. 형들과는 내일 아침 대수형 사무실에서 비상 회의를 갖기로 한다. 아빠가 친구들과 오랜만에 즐겁게 노라고 지금까지 버텨주셨나.. 싶다.

집에 오니 6시. 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아빠랑 영상통화 해볼래? 한다.
용기가 나지않아 미적거리던 중~ 언니가 대뜸 ‘아빠 주현이야 주현이!’ 하면서 영상통화로 화면 전환을 해버린다.

2~3주전 뵜던 것관 판이하게 다른, 정말 해골만 남은 듯 말라버린 아빠의 얼굴이 휴대폰 화면 전체에 비춘다. 코에 호스를 두르고 거친 숨에 입은 다물지 못하나 눈은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시며, 언니의 물음에 큰 날숨으로 답을 하신다.

갑자기 목이 메어 ‘아빠 힘내! 힘내 아빠!’ 만 연신 외치고 통화는 끝이 났다.

나중에 언니 말이, 그때 나와의 영상통화가 아빠가 마주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한다.

저녁밥이 텁텁하게 느껴져 남편과 큰애와 반주로 소주 한잔씩을 들이키고 있을 즈음 다시 언니에게 전화가 온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엄마도 선경이도 없는데!'라면서 엉엉 운다.

긴급히 형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다들 화순전대병원으로 달려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지막 모습을 안보일려 가족 외엔 만남을 꺼려한다는데~ 아빤 당신 정신이 살아있는 마지막 그 시간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행복해하셨다.

그리고, 평생을 그러하셨 듯 모든이에게 그져~ 고맙다..더 잘하지 못해 미안하다.. 주구장창 그 말씀 뿐이셨다. 영상 통화땐 손가락 들어 올릴 힘 있는 마지막까지 하트모양 뿅뿅 날려주셨다고 한다. 놀라울 뿐이다. 승희가 아버지 딸 맞구나! 였다.

당신 영정사진도 직접 액자에 준비하셔 거실 한켠에 세워두셨고 장례도 자연장을 원하셨으며 가족 또한 사후 모든 장례절차와 형식은 간소하고 소탈하게 치루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심지어는 부고 문자에 가족 명의로 계좌를 올리는 것도 반대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는 온몸 헌신한 먼저 간 수많은 별들이 있었다.

오늘, 내마음의 큰 별이 갔다. 영원히 갔다. 승희를 보낼 때보다 더 슬프고 더 눈물이 나오는건 왜일까..

지난 5월 께 목포 구신서 선생님과 아빠 댁에 찾아뵜었다. 소문처럼 이미 아빠는 몹시 쇠약해지셔 겨우 앉아있는 정도였고, 난 '아빠가~다시 일어서실 수 없겠다'는 생각을 그날 처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평소 좋아했던 노래인 ‘Memories'로 폰 통화연결음과 벨소리를 바꿨다.

한 때 꽤 오랫동안 빌보드 상위를 유지했던 요즘 젊은이면 다 아는 누군가의 추모곡이기도 한 곡. 왠지 그날 아빠를 본 후 내 휴대폰에 담고 싶어졌다.

어제까지 4일, 장례를 모두 마치고,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앉아 ‘Meories'를 뚱땅거려본다. 가사가 모두 내 마음을 옮겨놓은 것 같다.

왜 눈물이 핑 돌다 건반위로 뚝뚝 떨어진다. 아빠 생각이 정말 많이 난다. 만 하루밖에 안지났는데, 벌써 그립다.
아빠 안녕!

2021년 7월 16일
 

변주현 올림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부회장. 박승희 열사 모교 정명여고 친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