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31일 광주극장에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회고전을 열어 ‘여행자’(1974),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클로즈업’(1990),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체리향기’(1997),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1999), ‘키아로스타미의 길’(2005), ‘24프레임’(2016)을 상영한다.

어린 시절 숙제를 하지 않은 날이면,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설 때부터 가슴이 쿵쾅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 모든 선생님이 권위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숙제를 하지 않으면 매를 맞거나 교실 뒤로 나가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체벌이 흔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는 ‘숙제를 하지 않은 게 이토록 혼날 일인가?’라는 의문보다, 선생님 말씀이 그저 절대적인 법처럼 느껴졌고 이를 거역할 시 뒤따라오는 후환들이 두려웠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어떻게 하면 체벌을 피할 수 있을까 매번 궁리하기 바빴던 건 아닐까.

아마도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이름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순 있어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라는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의 노스텔지아를 ‘아주 저릿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 중 하나다. 친구에게 숙제 공책을 전달하기 위해 낯선 마을로 떠난 주인공 아이의 여정.

이것이 전부인 이 영화에 어떠한 거창한 메시지는 없다. 언젠가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감독이 할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며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을 복돋워주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한 적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고정된 주제를 찾는 것만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주인공 ‘아마드’의 여정 그 자체가 주제라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이란 코케 마을의 한 초등학교. 어느 날 선생님은 숙제를 하지 않은 ‘네마자데’를 호되게 혼내면서 다음에도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그런데 하필 ‘아마드’가 ‘네마자데’의 공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여 챙겨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무섭게 엄포를 놓던 선생님과 잔뜩 겁먹은 친구의 모습이 동시에 아른거리던 ‘아마드’는 어떻게든 공책을 돌려줘야 할 것만 같은 사명감에 휩싸인다.

모든 것에는 원칙이 있다며 숙제는 꼭 공책에만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유연하지 못한 태도, 권위의식은 ‘아마드’를 열심히 뛰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된 셈이다.

이 지지부진하고도 답이 없는 여정에서 가장 먼저 엄마와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마드'는 엄마의 심부름이라면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착하고 바른 아이다. 그래서 짐작건대 이번이 생애 처음으로 하는 반항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진실이지만 엄마는 어린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숙제하기 싫어 내뱉는 변명쯤으로 받아들인다. “오늘 가져다줘야 해요. 내일 주면 늦어요”라며 애원하는 말에도 절대 굽히지 않는 엄마의 권위적인 태도에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그래도 아이는 길을 떠난다. 언덕 위 '지그재그' 길을 힘차게 뛰어올라 정확히 어딘지 모를 친구의 집을 향해 뛰고 또 뛴다. 어느새 ‘포시테’ 마을에 도착한 ‘아마드’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네마자데’의 집이 어디냐며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어른들은 적극적으로 찾아줄 의지도 여유도 없다. 심지어 이 아이를 귀찮은 존재쯤으로 여긴다. ‘아마드’가 아는 정보는 ‘네마자데’라는 흔하디흔한 이름과 친구가 ‘나무 옆집에 산다’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같은 불투명한 상황에서 아이의 순수함은 어른들의 권위의식과 자꾸만 교착된다. 이러한 충돌은 이야기(여정) 자체에 모호함을 부여하면서 꾸준히 의문을 제기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대사의 반복과 인물의 표정, 몸짓으로 대부분 이루어진다. 그러다 갑자기 등장하는 두 노인의 대사에는 유일하게 서사가 담겨 있다.

‘아마드’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린시절 매맞고 자랐던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에게 순종을 가르쳐서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식의 논변을 늘어놓는다.

한편 어두운 골목길에서 빛과 함께 나타난 어느 노인은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해 아쉬워하면서 도시보다는 시골이 낫다며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노인은 들꽃을 뽑아 ‘아마드’에게 건네면서 친구의 공책 사이에 끼워두라고 당부한다.

이 두 노인과 ‘아마드’의 관계성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단순히 흑백논리로 이해하기보다는 두 노인의 경계에 있는 무언가를 사유해볼 것을 영화는 슬쩍 권할 뿐이다.

물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이 두 노인의 말이 관객뿐만 아니라 ‘아마드’의 마지막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토록 갈망했던 친구의 집 앞에 드디어 당도하지만 ‘아마드’는 발길을 돌리는 선택을 하고 만다. 순간 거친 바람이 불어서일까.

생각해보면 이 모든 여정이 바람처럼 갑작스럽게, 자연스럽게 닥쳐온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아마드'는 다음 날 학교에서 '네마자데'에게 공책을 건넨다. 

그 안에는 숙제가 빼곡히 적혀있고 곁에는 노인이 준 작은 들꽃도 있다. 이처럼 영화는 이것이면 되지 않겠냐는 듯 살포시 이야기를 끝맺는다.

한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함께 이란 3부작, 길 3부작, 지그재그 3부작, 또는 ‘지구를 울린 3부작'(Earthquake Trilogy) 으로 불리며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을 수상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1969년 이란의 어린이지능개발연구소(KANUN) 영화제작부에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여행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같은 청소년 영화를 다수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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