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 당시 1학년 중학생으로 참가
"부통령 이기붕의 집안 살림에 문화적 충격"

1960년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던 해,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내 기억으론, 당시 광주 인구가 27만 명이었고, 서울 인구가 270만 명이었다.

광주가 도시였다고는 하지만, 서울에 비하면 촌이다. 촌놈이 서울에 올라간 지 한 달여 만에 4.19를 겪은 것이다.

국립 4.19민주묘지.
국립 4.19민주묘지.

담임선생님(김택규-수학)은 어김없이 데모대를 따라다니지 말라는 엄중한 지시를 내렸다. 휴교령이 내려진 터라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데모대의 뒤를 따라다녔다.

소독 방역차의 하얀 연기 속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어린이와 같이 데모대를 따라다닌 것이다.

서대문 네거리를 지나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집에까지 들어갔다. 박마리아의 베르벤또 치마가 불타고 있었다, 수박이 깨져 있었다. 칠면조가 있는 닭장도 있었다.

수세식 변기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어머니의 검은 통치마와 비교되는 베르벤또 치마, 씨앗을 심어야 할 4월에 보는 수박 덩어리, 그림으로만 보았던 칠면조와 닭장, 조선 시대 측간과 비교되는 수세식 변기는, 어린 소년인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이다. 빈부 격차에 대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잠재적 분노가 머리와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었는지 모른다.

얼마 후, 이 집이 4.19혁명도서관이 되었다. 나는 그 도서관을 고등학교 때까지 드나들었다. 3.15 부정선거로 국민으로부터 쫓겨난 집을 드나들며, 지금의 나를 단련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4.19 학생 의거는 광복 15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교육을 받아오다가, 민주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한 지 15년 만에, 더 짧게 보면,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중단된 지 7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실로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빛나는 사건이다. 민주주의가 고속성장하지 못했으면, 3.15부정선거와 부패를 어떻게 막았을까 싶다. 나라를 잃었던 백성들의 한을 쏟은 우골탑의 공을 확실하게 본 것이다.

김선호 전 효광중 교장.
김선호 전 효광중 교장.

벌써 61년이 흘렀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세계 10대 강국이 되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여러 부문에서 한류를 넘치게 하고 있다.

반면에 독점 자본에 따른 심각한 빈부 격차, 바람직하지 못한 지나친 경쟁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 불균형의 양극화, 비인간적 현상의 증대 등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큰 과제로 남아있다.

이 과제를 교육으로 해결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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