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생명!

좁은 계단을 오르면 작업실이었다. 작품들이 빼곡히 중첩되어 있었다. 오래전 작업부터 현재의 작업까지, 크고 작은 캔버스들이 화려한 빛깔로 안착해 있었다.

대부분 작업이 평면이면서 재료의 혼재였다. 처음엔 한가지의 재료였을 것이다. 탐구하며 깊어지면서 새로운 질료를 찾았을 것이고, 생각을 조형하는 언어는 여러가지 재료를 복합하게 했을 터였다.

축축하고 차가운 날이었다. 바람은 불었으나 햇볕은 오락가락 전형적인 늦겨울과 새봄 사이의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민들레, 현재도 민들레

이영범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이영범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민들레를 좋아한다. 끈질긴 생명력을 경외한다. 손톱만큼의 흙만 있어도 뿌리를 박는 생명의 힘. 먼지 위에도 뿌리를 내리는 희망. 바람에 흩날려 어디로 떠나든 망설임이 없는 당당함.

언제든지 흩날릴 준비로 하얗게 눈처럼 피어있는 홀씨의 희망. 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흔들리다 그곳이 어디가 되어도 멈출 시간에 마침내 자리를 잡는 생명.

우리는 잡초의 생명력을 두려워한다. 생명력을 ‘도저히 해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생명력이 두려워 제초제를 뿌리고 말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질긴 생명으로 다시 자라는 것이 잡초다.

민들레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는 “생명력 강한 민들레에 마음을 뺏긴 지 십수 년 전이다. 하지만 단지, 민들레가 가진 질긴 생명력에 대한 경외감으로 민들레를 바라보지는 않는다.

생명의 숭고함과 희망을 더 깊이 바라보려고 한다. 바람에 날린 홀씨가 그 어딘가에 닿아서 그곳에 펼칠 메시지를 내 작업 안에 조형하고 싶은 것이다.” 고 민들레에 천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민들레의 생명력은 작가에게도 의미가 깊다. 민들레처럼 살았다. 응용미술을 전공했으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정이 미술학과에 편입하게 했고, 만학의 나이에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민들레 작가로 우뚝 자리매김했다.

시를 쓰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어린 시절 열병으로 청각을 점점 상실해 가면서도 마음으로 듣는 소리의 메시지는 점점 크게 와닿았다.

작가는 “때때로 소리를 잘 듣지 못했지만, 그것이 청각장애란 것을 인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지금도 장애에 대한 반응이나 절망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생활에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덕택에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렸다.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것들이 더 발달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마음으로 듣는 민들레의 희망

화폭 안에는 크고 작은 민들레가 바람에 일렁인다. 그 민들레는 다양한 재료 중에 자개로 피어난 민들레다.

우리의 자개는 쓰임새가 많았던 규방공예의 대표적 재료였지만 작가에겐 민들레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최대의 질료로 쓰인다.

작가는 “처음 민들레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동안 사용했던 재료의 조형이 당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과 생명력이란 보이지 않은 물성 앞에서 그것을 더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언어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내게 온 것이 자개였다.”고 설명했다.

일일이 자개를 자르고 아교로 붙인다. 실처럼 가늘게 잘라낸 자개는 핀셋을 사용해야 할 만큼 섬세하다. 부러지기 쉬운 특성을 간과해서는 여태껏 몰두해 온 모든 것을 놓친다.

이영교- '민들레 연가'. 24.3×33.4cm   자개, Mixed media -2. ⓒ광주아트가이드
이영범- '민들레 연가'. 24.3×33.4cm 자개, Mixed media -2. ⓒ광주아트가이드

숨을 멈추고 아교를 달래가며 민들레 홀씨 하나를 완성하는데, 작가의 집중과 노동은 최고치에 이른다.

둥그런 원으로 완성된 민들레 홀씨는 자개와 자개 사이에 바람과 희망의 메시지를 열매로 안고 줄기를 떠나 바람이 멈춘 바로 그곳에서 뿌리를 내릴 것이다.

작가는 “회화를 전공하기 이전 응용미술을 전공했던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물론 회화적 요소가 당연하지만, 민들레 홀씨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과감하게 주변의 사물은 배제한다. 우리의 오방색을 사용한 단순하면서 화려한 색감에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민들레를 강조해보는 것이다.”고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 주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흔들었다. 손을 들고 리듬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광장은 텅 비었다. 사람과 사람의 간극은, 더이상 어찌할 수도 없다.

그래도 텅 빈 광장의 아스팔트 사이에서, 먼지가 손톱만큼 쌓인 벽들의 틈새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춘 하수구의 철제 뚜껑 위에서 민들레는 자라나고 홀씨를 휘날린다.

다시 봄. 민들레의 새싹이 이곳저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강력한 바이러스 앞에서 인류가 결코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것처럼. 바로 작가가 민들레에 천착하는 이유일 것이다.


**윗 글은 (광주아트가이드) 137호(2021년 4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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