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자 동아일보 파리 김윤종 특파원이 쓴 다음과같은 기사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지난해 10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던 프랑스 교사 참수 사건이 13세 소녀의 거짓말에서 시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8일 일간 르파리지앵에 따르면 최근 경찰 당국은 당시 사건의 발단이 된 A 양(13)이 “학교 수업을 여러 번 빼먹은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켜 혼날까봐 거짓말을 했다”고 한 진술을 확보했다.]

가히 충격적이지 않는가? 13살이면 우리로 중학교 1학년 학생이다. 한 학생의 거짓말이 한 교사를 참수해 죽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일까?

아이들의 거짓말은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어쩌면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이 가장 쉬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교육은 그런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살펴야하는데도 어른들마저 촘촘하게 노력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거짓말은 일상이다.

“가장 신성한 수업시간인데 제가 어떻게 졸겠어요.” 직전에 떠들던 학생을 쳐다보니 엉뚱하게 자신을 변명한 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은 그나마 귀엽다.

최악의 거짓말은 자신의 상황을 유리하게 벗어나기 위해 꼬리를 무는 거짓말을 할 때다. “지금 딴짓하는 물건을 가지고 나오세요” 하면 조금전까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두고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시치미를 뗀다. 뿐만 아니다. 가지고 나오라는 교사의 요구에 “나를 의심하세요” 으름장까지 늘어 놓는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배이상헌사건은 한국판이다. 배이상헌교사는 중학교 1학년 도덕을 가르쳤다. 수업시간에 공식적으로 다루는 성평등 수업이 어떤 학생들에게 기분 나쁘다고 신고되었다. 행정기관은 매뉴얼의 노예처럼 정직 3개월을 처분했다.

배이교사는 참수까지는 아니었지만 사회적 참수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건의 발단도 거짓말이 시작점이다. 이해를 못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부모들까지 나서서 몰아붙인 것이다. 행정기관은 민원 이상도 이하도 살피지 않고 사법기관으로 내몰고 무죄가 되었는데도 품위유지위반으로 죄를 만들었다.

거짓말은 사건이 되면 사실여부를 구분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모르는 사람들은 ‘누가 그랬다고 하더라’하면서 또 다른 사실로 회자시킨다. 이렇게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학생들은 쉽게 거짓말을 한다. 집에 가서 선생님이 오히려 기분 나쁘게 했었다고 없는 거짓말도 정교하게 재구성된다. 학교에서는 그 학생의 상습적인 거짓말로 문제가 되었을 때 부모에게 면담을 요청하면 부모는 한술 더 뜬다. 집에서 그러지도 않고 선생님이 빡빡하게 학생을 다뤄서 벌어진 일이라고 맞선다.

교사는 거짓말투성이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평소 행동을 일지식으로 정리해 둬야 겨우 설득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몇 일날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어떨 땐 해당교사의 개인 일지로는 불충분하다. 동료교사들의 입체적인 자료가 동원되어야 겨우 수습된다.

노영필 교육평론가.
노영필 교육평론가.

이른바 학생인권으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학교는 교사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다. 자칫 교사도 모르게 개인적인 감정이 쌓아둔 학생이 있다면 교사는 반인권적인 사건으로 내몰릴 수 있다.

요즘 교사들은 시비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교육이 사라진 셈이다. 바로잡기 위해 가르치려고 나서지 않는다. 아이에게 친화력을 만들려고 농담을 하려다가 걸려드는 경우도 있다. 수업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던졌다가 아동학대로 걸려든 경우도 있다. 교사들은 무미건조해지고 있다.

학생들이 하는 거짓말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쓰는 비겁함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혼낼 수만 없다.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눈감아야 할 때도 있다. 아이들은 변화하고 성장하니까, 교육은 그 여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벌이고 있는 거짓말은 인권이란 울타리로 보호되고 교사들이 참수의 길로 내몰리고 있어 슬프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