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비운의 여성 독립운동가 윤혈녀
[기고] 비운의 여성 독립운동가 윤혈녀
  • 5ㆍ18부상자동지회초대회장(연극인)
  • 승인 2021.03.0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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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일, 102년 전을 생각한다.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 1일,정부는 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을 기존 3등급(건국훈장 독립장)에서 1등급(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격상했다.

빛고을 광주하면 5ㆍ18이 생각나고 상징적인 인물로 윤상원 열사가 떠오른다.

3.1절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19년 3월 1일 정오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옥상에서 100년 광주 수피아 여고생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윤혈녀(윤형숙)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만세 삼창'이 재현되고 있다. 옛 전남도청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의 '최후의 항쟁지'다. ⓒ광주인
3.1절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19년 3월 1일 정오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옥상에서 100년 광주 수피아 여고생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윤혈녀(윤형숙)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만세 삼창'이 재현되고 있다. 옛 전남도청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의 '최후의 항쟁지'다. ⓒ광주인

그러나 수많은 이름 없는 열사들이 있다.거슬러 올라가면 의혈의 고장 광주에 유관순 열사보다 극적인 분이 계셨다. 바로 윤혈녀(본명 윤향숙)열사다.

3ㆍ1 운동 102년을 맞아, 비운의 여인 아니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혈녀 열사의 열혈적인 독립운동투쟁과 불꽃 같은 삶을 떠올린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조들의 투쟁은 엄청났다. 3ㆍ1 운동 당시 광주도 마찬가지.3윌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천 큰 장터에서 시작됐다.

3ㆍ1운동 당시에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박애순 교사(1896ㅡ1969)가 재직하고 있었다. 그런 영향때문이었을까 2학년 윤형숙(1900ㅡ1950)도 급우 60여명과 함께 참여했다.

3.1절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1일 광주시민들이 금남로에서 '31.만세 대행진'을 펼치며 '대한독립 만세', '자주평화 통일', '5.18왜곡 처벌'을 외치고 있다. ⓒ광주인
3.1절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1일 광주시민들이 금남로에서 '31.만세 대행진'을 펼치며 '대한독립 만세', '자주평화 통일', '5.18왜곡 처벌'을 외치고 있다. ⓒ광주인

그리고 열혈 소녀 윤혈녀는 기백여명의 시위대 행렬의 맨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시위대가 본정통(현 충장로)을 돌아 경찰서 앞으로 진입했다.

무지비한 일본 헌병은 총을 쏘며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기죽지 않았다. 힘차게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던 윤 열사의 왼팔 상단부를 칼로 내리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잘려나간 팔에서 붉은 피가 땅에 뿌려졌다.

열사는 유혈이 낭자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오른 팔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들었다. 윤 열사는 팔이 잘려 병원으로간 게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일경에 체포됐고, 치료를 받지못한 채 조사를 받았다.

'너의 이름이 무었이냐?'
'내 이름은 윤혈녀다'

장난치지 말고 본명이 뭐냐고 물었다.
'보면 모르겠느냐? 피흘리는 혈녀 윤혈녀다.'

광주시민들이 지난 2019년 3월 1일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금남로에서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광주인
광주시민들이 지난 2019년 3월 1일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금남로에서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광주인

그리고 열사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오른 쪽 눈마저 멀었다. 그녀는 재판정에도 나갈 수 없었다. 궐석재판으로 4년형의 판결을 받았다.

혈녀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얻게됐다는 설도 있지만, 수피아 여고 학적부에 윤혈녀라고 적혀있는 걸 감안하면 3ㆍ1운동에서 비롯돼지 않았을까 싶다.

윤 열사는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 봉산학원 교사로 교펀을 잡았다. 장애를 극복하고 선교활동을 하며 야학을 열어 마을사람들을 가르치는 문맹 퇴치운동을 펼쳤다.

그녀가 독신으로 살던 중,민족의 비극인 6ㆍ25를 만났다. 9ㆍ28 수복 당시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붙들려서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총살당했다. 그녀의 나이 50세,인생을 즐길 꽃다운 중년,그녀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서럽게 지고 말았다.

1960년도에 윤형숙 묘비 건립 기성회에서 여수시 소라면 관기리 80번지에서 묘비제막을 했다. 그리고 2002년에 여수시의 노력으로 서훈 신청을 했다. 3ㆍ1운동 85주년이 지난 2004년에 정부는 윤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광주인
ⓒ광주인

이처럼 광주에는 비록 알려지진 않았지만 훌륭한 애국자가 많다. 만약에 윤 열사가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면 유관순보다 훨씬  유명하지 않았겠는가?

1980년 5.18민중항쟁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자랑스러운 5ㆍ18민중항쟁이다. 그때 산화한 한 분 한 분이 바로 역사의 교훈이고 스승이다.

역사의 숨결을 타고 봄이 온다. 2021년 3월 1일에 통일조국의 꿈을 그려본다. 그러나 아직도 대한민국은 식민지 아닌가? 열사님과 선조들에게 참 죄송하고 부끄럽다. 아니 통일은커녕 5월동네가 너무 시끄럽다. 그러니 어떻게 경건한 마음으로 봄을 맞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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