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하얗게 핀 가시나무 꽃 핥아먹었지' 펴내
일제말 군인·군무원·노무자·여자근로정신대 동원 피해자 31명 증언 수록

“아카시아 꽃이 3월 달이면 하얗게 피어요. … 가서 고놈 핥아먹느라고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일 안 나가고 고놈 핥아먹느라고. 아, 고놈이라도 핥아먹은께 살 것 같드란 말이요.”(권창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돼 광주·전남지역에서 국외로 강제징병·징용된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구술집이 발간됐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지난 23일 강제동원 기록구술집 『배고픔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하얗게 핀 가시나무 꽃 핥아먹었지』(미디어민·338쪽)를 펴냈다.

구술집은 1942년부터 1945년 사이 군인(8명), 군무원(8명), 노무자(9명), 여자근로정신대(6명)로 강제동원 된 31명의 피해자가 겪었던 역사적 아픔과 어긋나 버린 삶의 행로를 증언하고 있다.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전쟁터나 강제동원지로 끌려가 배고픔과 공습의 공포 속에 신음하며 강제노역으로 고통을 받았다.

구술집에 실린 증언이 수많은 강제동원 피해자 중 극히 일부에 불과 하지만 당시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파악하는데 충분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이후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과 1939년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여 조선의 물자를 수탈하고 인력을 강제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전된 이후 전쟁에 동원할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1942년부터 조선인 연행방식을 모집에서 관 알선으로 바꾸고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44년 4월에는 징병령을 실시하여 조선 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연행하고 8월에는 국민징용령, 여자근로정신대령 등을 시행해 조선인 청장년과 어린 소녀들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구술집에 기록된 강제동원 피해자 중 군인은 8명이며 대부분 1924년 ‘묻지마 갑자(甲子)생’이었다. 1944년 징병제 시행 첫해 만 20세로 징병 영장을 받고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전투현장으로 투입됐다.

군무원으로 동원된 8명은 취업 또는 기능공 양성 교육, 군사훈련을 받다가 연행됐으며, 일본 도쿄, 가고시마, 오키나와, 나고야 등 군사시설은 물론 남양군도까지 끌려갔다.

노무자로 동원된 9명은 탄광(3명), 군수회사(4명), 농사보조 노무원, 방공호 공사장에서 강제로 노동했다.

여자근로정신대 6명 중 3명은 아이치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2명은 도야마현 후지코시강재 회사로 동원됐다. 나머지 1명은 만주 봉천에 있는 삼양사가 설립한 남만방적 공장으로 동원됐다.

구술증언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징병검사에서 제2 을종으로 군 면제 대상인데 징병되거나(이경석), 해방되고 일본 공장에 돈 받으러 갔다가 쫄딱 망했는데 뭔 돈이 있것냐며 못 받기도 했다(이춘식).

노무자를 뽑아 일본에 보내는 담당이 형님인데 나를 보내고(조주호), 일제 순사의 동생을 대신해 끌려가기도 했다(양오섭). 결혼 보름 만에 영장이 나오거나(최영균), 해방되던 해 먼저 징용 간 형님이 아무 말 없이 혼자 귀국(김준수)한 사례 등이 그렇다.

가슴 아픈 증언도 있었다.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끌려간 어린 소녀들의 사연은 특히 그랬다.

안 간다고 하면 너희 아버지, 어머니 다 경찰서 잡아 가둔다(양금덕)는 협박과 일본에 가면 밥도 배부르게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김재림)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일본에 갔지만 배가 고파서 한국에서 가져 간 옷하고 밥하고 바꿔 먹고(곽옥남), 지진이 일어나 담도 허물어지고 고놈 밑에서 두 명이 깔려 죽고(정신영), 공습이 오믄 죽을둥 살둥 저녁 내내 날 샐 때까지 도망다녔다(주금용)는 증언도 있었다.

그래서 주금용 할머니는 후지코시로 끌려간 어린 소녀들이 “후지코시 좋다고 누가 말했나. 벚꽃 나무 그늘 아래서, 인사과 기무라가 말한 듯 하다, 나는 감쪽같이 속았다.”는 신세 한탄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했다. 또 만주 봉천 남만 방적에서 일한 오연임 할머니는 “2년 동안 일하고 검은 고무신 하나 산께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이번 구술집은 광주광역시의 지원으로 시민모임이 지난 2018년과 2019년 광주·전남 일제 강제동원 생존피해자 31명을 만나 청취한 구술채록 자료로, 1,0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구술자료를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재정리한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31명 중 남자는 25명, 여자는 6명이며 피해자 가운데 조주호 어르신이 1922년생으로 가장 연장자였고, 오연임 할머니가 1936년생으로 나이가 가장 어렸다.

구술집에 기록된 피해자 가운데 정유한, 김오곤, 조주호, 전홍일, 남정노, 권충훈, 곽옥남 등 7명의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구술집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등지거나 질병 등으로 증언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이번 구술집이 마지막 육성 증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기억을 남기는 것은 두 번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삼기 위해서”라며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분들을 위해 오늘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되묻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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