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하늘도 무등산도 바라볼 수 없는 부끄러움과 참담함으로 이 글을 쓴다."

평범한 사람이 집권욕에 광분한 전두환 집단을 만나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하게 됐다. 그런 과정에 가끔 동창회나 향우회에 참석하면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인기가 떨어졌다. 요즘에는 전화벨이 울리면 겁이 난다. 국민들로부터 각광(?)을 받기 때문 일까?

지난 1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옛 5.18묘지(민족민주열사묘역)가 흰눈에 덮여 있다. ⓒ광주인
지난 1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옛 5.18묘지(민족민주열사묘역)가 흰눈에 덮여 있다. ⓒ광주인

존경(!) 받는 5월단체가 지탄 받는 5월로 몰락해가고 있는 작금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며 5월 단체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1980년 5월의 슬픔을 지우기 위해 태어난 단체가있다. 1980년 6월 6일 5ㆍ18유족회가 그 주인공이다. 초대 회장이었던 박아무개를 어용화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여성회장을 선출했다. 당국은 송아무개 회장을 취업이란 미끼로 유혹했다. 한 달 만에 다시 회장을 선출해야했다.

그래서 등장한 전계량 회장의 유족회도 순탄하지 않았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의 치부가 드러난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남지역개발협의회'라는 유령단체를 앞세워 1983년도에 5ㆍ18 묘지 이장 음모를 획책했다.

결국 26기가 옛 망월동 묘지를 떠났으며 유족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8월에 5ㆍ18 광주의거부상자회가 닻을 올렸다. 초대 회장 박석연(작고)에 이어 2대 회장 이지현이 선출됐다. 

전두환의 초도 순시 때 경찰관과의 마찰로 필자가 특수공무집회 방해죄로 구속돼자, 기자 출신의 박옥재 회장(작고)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1986년 5월에는 5.18항쟁 당시 10대와 20대의 청년으로 참여했다가 부상과 구속을 당했거나 또는 가족을 잃은 유족 중에 젊은 청년들이 5.18청년동지회(약칭 오청동. 초대회장 정태영)를 결성하여 투쟁에 앞장섰다.  

5.18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 ⓒ광주인
5.18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 ⓒ광주인

1987년 6월항쟁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를 통해 청와대 입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주시민과 5월단체 회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옥재 회장이 참여했다.

그러자 강경파 회원들을 중심으로 5ㆍ18민중혁명 부상자 동지회(약칭, 오부동. 회장 이지현)가 출범하며 갈라섰다. 그 이후 통합을 하여 5ㆍ18유족회(회장 정수만)와 함께 1995년 5ㆍ18특별법 투쟁을 주도하여 학살자들을 법정에 세웠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 2021년 현재 (사) 5ㆍ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회장 김이종)에 이르렀다.

5.18항쟁 당시 구속자들은 폭도로 몰려 운신이 힘들었다. 가까스로 1984년도에 구속자 협의회를 결성한 후 5ㆍ18민중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 추진위원회(약칭, 오추위)를 출범시켰다.

그후 1988년 초 청년들을 중심으로 5ㆍ18항쟁동지회(약칭, 오항동)를 창립했으며 초대 회장으로 정상용씨를 추대했다. 이어 1980년 5.18 항쟁 당시 상황실장을 지낸 박남선씨를 주측으로 5ㆍ18 구속자회가 탄생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김군'.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김군'.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그러다가 부침을 거듭한 끝에 구속자, 부상자, 기타 1급 2급, 유족들까지 포함된 (사)5ㆍ18 구속부상자회(초대회장 양희승)가 2010년에 출범했다. 그러나 12년 장기집권이란 오명을 안고 퇴진했다.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한 회원들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것이 현 문아무개 회장 집행부다. 지금가지 간략하게 열거 한 것이 현재 5.18 3개 단체의 출범 과정이다.

그 동안 5ㆍ18단체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이용당하기도 했고 분열됐다. 물론 단체 회원들의 잘못으로 실망시킨 적도 있었다. 5ㆍ18기념재단 출범 과정도 그렇고, 5ㆍ18 3개 단체 중 특정단체가 가끔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요즘의 5.18구속부상자회 논란과 관련해 현 문 회장 집행부가 불신과 의혹을 남겼지만 국가보훈처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2005년도부터 공법단체를 준비한 5월단체를 다른 타 단체에 비해 홀대했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4ㆍ19 단체를 3개 단체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5ㆍ18에는 1개의 단체로 통합을 강요하다 작년 말에 3개 단체로 인정했다.

18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 대표들이 7일 광주광역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명정대하고 민주적인 5.18공법단체 구성과 함께, 공법단체 구성원에서 누락된 유족회의 형제자매가 추가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에 공동으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편부터 문흥식 5.18구속부상자회장, 경영훈 유족회장, 김이종 부상자회장. ⓒ5.18구속부상자회 제공
5.18유족회, 5.18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대표들이 지난1월 7일 광주광역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명정대하고 민주적인 5.18공법단체 구성과 공법단체 구성원에서 누락된 유족회의 형제자매가 추가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에 공동으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편부터 문흥식 5.18구속부상자회장, 김영훈 5.18유족회장, 김이종 5.18부상자회장. ⓒ5.18구속부상자회 제공

또한 2009년에 (사)5ㆍ18민주화운동부상자회를 인준했음에도, 2010년에 유사한 명의인 (사)5ㆍ18 구속부상자회를 용인했다.

특히 작년 말 공법단체 설립을 위한 임원 선출 규정 58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칙 2조 3항을 삽입시켜 간선제를 유도했다.

이런 보훈처의 처사는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여 총회를 통해 지부를 구성하려는 5월가족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코로나19와 생계문제로 힘든 2021년 새해 벽두부터 특정단체때문에 곤욕스럽다.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기가 두렵고 잠을 이룰 수 없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지역 여성들이 주먹밥을 만들기 위해 밥을 짓고 있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지역 여성들이 주먹밥을 만들기 위해 밥을 짓고 있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어디 우리 뿐이겠는가. 1980년 5월부터 40년 동안 묵묵히 응원했던 국민들은 큰 실망감에 등을 돌리지 않았을까. 입이 천개라도 할 말이 있겠는가!

잘못을 했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리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1980년 5월 27일 새벽을 지켰던 환골탈퇴의 각오로 민주화와 통일의 지평을 여는 일, 그것이 바로 5월가족들의 숙명이 아닐까!

공법단체보다 소중한 것은 세계 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광주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5월은 명예이자 멍에다. 부디 나눔과 배려와 소통의 주먹밥 공동체 정신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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