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건 기억해야

‘반찬 투정이냐. 6·25 때는 보리죽도 못 먹고 살았다.’

‘할머닌 또 그 얘기.’

사실이다. 보리죽도 못 먹었다. 씹지도 않았는데 보리밥이 그냥 넘어가더라. 그만큼 굶주리며 살았다. 지금도 그때처럼 살자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기억할 일은 기억하자는 얘기다. 박정희·전두환 시절 말조심은 필수였다.

‘여기가 평양이냐. 말도 맘대로 못하게’

목에 힘 좀 준다는 방송국 PD 하나가 한잔하시고 택시에서 큰소리치다가 기사님의 신고에 파출소 신세를 졌다. 매 좀 맞았지. 얼마 후 그는 실업자가 됐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 그는 복직됐다. 얼마나 좋은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어찌 그 많은 사연을 모두 기억하고 산단 말인가. 인간의 기억용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잊어버리는 재주도 가졌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도 딱하지만 죽어도 잊지 말자. 복수만 다짐하는 사람도 곤란하다.

■평화! 잊으면 사람도 아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민주당 누리집 갈무리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민주당 누리집 갈무리

국민에게 욕도 많이 먹는 국회지만, 때로 정치인들은 좋은 일과 좋은 말도 많이 한다. 화해, 공정, 평등, 통일 등 다 기억을 못 한다. 한데 너무 좋은 말들을 많이 해서 그런가. 잊는 게 많다.

우리 국민이 가장 가슴에 한으로 남은 것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평화다. 6·25라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남북이 총질하는 현장에서 쓰러지는 젊은이를 목격한 사람이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간 그들 뒤에는 피눈물 흘리는 부모가 있다.

왜 우리는 총질을 했는가. 우리의 의지냐.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했고 남의 나라를 먼저 침범한 적도 없다. 요즘 우리의 가슴에서 증오를 빼면 남는 게 무엇일까. 가슴이 텅 비어 하늘로 붕 떠버릴 것이다.

■용서란 무엇인가

기레기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부르는 기자들이 많다. 자식처럼 여기는 기레기가 있다. 그와 사면론을 얘기했다. 기레기의 생각은 어떨까.

“선생님 앞에서야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기레기들이 자기 소신으로 기사 쓰는 건 아니지만 속도 없겠습니까. 사면했다고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는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면’ 속에는 ‘용서’가 있으니까요.”

생각이 제대로 박힌 기레기도 많이 있다. 있어도 소용없으니 비극이다.

‘욕심이 앞을 가리면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을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 나도 방송국 퇴직 후 연속극 한 편 얻어 쓰려고 담당 PD에게 얼마나 아부 아첨을 떨었던가.

(당시에는) 술도 밤 새 같이 먹고, 지금이라면 당장 목이 날아갈 짓도 서슴없이 했다. 욕심이 그렇게 무섭다. 어떤가. 지금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내가 민주당원이고 이낙연 지지자니까 한쪽으로 기울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다. 이번 ‘국민의힘’을 탈당한 어느 의원의 경우, ‘인간 사표’를 쓴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내 얼굴이 벌개진다. 정치인에게 신뢰는 생명이다. 신뢰가 없는 정치인의 행위는 껍데기 정치며 사기정치다.

정치인과 대화를 할 때 늘 먼저 말하는 게 있다. ‘난 벼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신이 더 없이 치사하지만 늘 그 말을 한다. 만약에 나에게 욕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레기들이 그냥 놔뒀을까.

아마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저 늙은이 돈 때문도 아니고 벼슬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 뭣 때문에 저 고생을 하지?’ 마음대로 해석해도 욕하지 않는다.

환경부 장관 내정자인 한정애 의원이나 민주당 정보위원회 간사인 김병기 의원의 후원회장도 겸하고 있다. 그들이 내게 후원회장 해 달라지 않았다. 내가 자청해서였다. 이유는 좋은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희귀한 정치인들인가.

사면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의 사면이 원수처럼 양편으로 갈라진 국민의 틈을 조금이라도 메꿀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 정도로 해 두자.

■용서 없인 평화 없다.

더럽게 편파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나만 보면 괜히 얼굴이 벌게진다. 지금은 대신문이라고 자처하는 언론사의 간부다.

어쩌다 길에서 만나면 내 인사는 ‘아직도 그 신문에 있느냐’. 그 친구 대답은 ‘지금 내가 어디 갈 곳이 있겠습니까.’ 맞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인간의 양심이란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샘물은 멈추지 않는다.

등산객이 목을 축이고 들짐승 날짐승도 오가며 마시는 생명수가 바로 옹달샘이다. 인간에게 양심이 없다면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옹달샘 같은 지도자가 그립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종국에는 죽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리가 없다. 서로 용서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 아. 너무 힘들 것이다.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지 말자. 잊을 것은 잊고, 잊어서 안 될 것은 잊지 말자. 죽으면 다 사라져 버린다. 죽을 때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죽자.

‘양심대로 살았다.’ 얼마나 부러운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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