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13년간의 투쟁기를 담은 다큐 '재춘언니'

자리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이 니체의 책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며 <햄릿>을 연기하고 노래를 부른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외침처럼, 이들에게 신은 정말 죽은 것만 같다.

2007년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사측의 어떠한 통보도 없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당하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많게는 수십년을 기타를 만드는 데 헌신했었고 콜트콜텍을 세계 기타 시장 2위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믿었던 회사에게 버림받은 영혼들은 길거리에서 복직을 위해 13년간 싸워왔다.

다수가 소수의 권력에 대항하는 형태는 각자 상상하기 나름이겠지만, 콜드콜텍 노동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일반적인 농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거리농성을 펼치며 의식주를 겨우 해결하는 이들에게 예술이란 뜻밖에 커다란 지지대처럼 작동한다. 예술은 1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버티는 수단 그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이를 통해 성숙한 집회의 한 일면을 보여주었고 니체의 책을 읽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며 노래하는 모습은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을 바라보는 제3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예술이란 무심코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제공 (주)시네마달
제공 (주)시네마달

프레임 안에서는 어떤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대사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묘하게 어우려진다.

특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로 문을 여는 이 영화의 처음과 “죽는 것만 빼고 다 경험해봤다”는 해고 노동자들의 말이 적절히 호응하는 대목에서 그렇다.

농성의 절정에서 단식을 펼치는 재춘 씨의 깡마른 모습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것일까’라는 답을 내리게 하다가도, 처절한 투쟁의 세월 속에서 결코 기타를 놓지 않는 모습을 통해 의지의 힘을 상기시킨다.

이들이 항상 기타 선율에 맞춰 흥얼거리는 노래의 가사.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처절하게 살아야 된다고, 동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2764일 거리의 인생...”에는 이 같은 지난 시간과 모순이 응축되어 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펼치는 ‘투쟁의 예술’ 중심에는 임재춘 씨가 있다. ‘재춘 언니’로 통하는 그의 은유적인 별칭 마저도 예술적이다.

한 개인의 인생만큼 가장 예술적인 것은 없다 했던가. 이 영화의 카메라는 가장자리에 선 노동자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재춘 언니’의 개인의 삶과 심리에 중심을 맞춘다.

그가 쓴 투쟁일기의 대목 대목을 인용하여 보는 이들의 감정이입을 돕고 재춘 씨의 글쓰기(읽기) 욕망을 통해 예술이란 누구에게나 열려있음을 시사한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에게 예술은 이러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무너트릴 수 있는 하나의 소중한 가치로 작용한 셈이다.

결국 <재춘 언니>는 재춘 씨의 순수한 시선을 통해 본 사회와 예술을 가감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그는 자신보다 남을 위하는 기질을 지닌 사람이며 밥을 잘하고 부끄러움은 많아 마음 속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한다.

그런 그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비단 연극에서 오필리아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재춘 언니’는 부드러운 내면의 힘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가 이 영화, 그리고 투쟁의 중심이 된 데에는 지금까지 우리 머릿속에 상정되어 있었던 인권 투쟁의 거친 이미지를 전복하기 위함이나 마찬가지다.

어떠한 측면에서 재춘 씨는 이러한 치열한 싸움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자신도 투쟁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부당한 처우와 불합리한 사회구조로 인해 벼랑 끝에 내몰린 어떠한 인간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지로, 힘껏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재춘언니’와 같은 인물을 통해 강조한다.

제공 (주)시네마달
제공 (주)시네마달

“나의 가장 큰 희망은 말로 표현되지도 실현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내 청춘의 모습과 위로의 모든 것은 그렇게 죽고 말았다.

어떻게 내가 그것을 견뎌냈는가. 어떻게 내가 그 상처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는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나의 영혼이 이들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렇다. 내게는 상처 입힐 수 없는 것, 영원히 묻어둘 수 없는 것, 바위까지도 부숴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의지이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해답으로 내놓는다. 농성 현장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독서모임 사람들과 함께 낭독하는 니체의 말은 남달랐다. 의지란 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의지란 고통 속에서 빛을 발한다. ‘재춘언니’는 투쟁하는 특정한 노동자의 의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잠자듯 살고있는 우리 모두를 각성시키는 존재와도 같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영화라는 예술은 ‘의지’의 형상화 그 자체로 작동한다.

이처럼 <재춘언니>에서의 예술은 프레임의 안팎으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며 우리가 당면한 각자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제공 (주)시네마달
제공 (주)시네마달

한편 <재춘 언니>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 메세나 상,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집행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광주독립영화제 등에서 상영된 바 있다. 향후 공동체 상영과 같은 형식으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 김수진 님은 <무비스트> 기자 출신으로 현재는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연구중이며 광주영화비평지 <씬1980>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