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역사와 그 역사를 경험해낸 이들의 증언 - 왕빙 감독의 '사령혼: 죽은 넋'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새삼스럽다고 느껴지는 이 질문은 <사령혼: 죽은 넋>(이하 <사령혼>)의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사령혼>을 구성하는 총 15개의 인터뷰 중 6번째 인터뷰이인 천쭝하이의 인터뷰가 끝나면 영화는 60년 전 강제노동수용소가 있었던 밍수이의 벌판으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마치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멀리 있는 사람을 끌어다 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러다 제자리에서 몇 걸음 이동하더니 시선을 내리고 그 밑에 널브러진 해골들을 응시한다(이 장면 이후에도 카메라가 밍수이의 벌판에서 해골을 발견하는 장면은 더 등장한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해골을 보면서 명심해야할 것은 <사령혼>이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이 말은 곧 해당 장면에서의 해골은 소품이 아니라 실재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실재하는 해골을, 관객은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이미지로 보게 된다.

그리곤 이 장면 전까지 진행된 인터뷰와 해골을 연결 지으며 생각할 것이다. 지금 이 해골은 60년 전 바로 이곳에 있던 수용소에서 죽어간 자들의 것이라고.

비록 실재가 아닌 이미지일지라도 대약진 운동에 관한 지식은 눈에 보이는 해골을 통해 관객에게 주어진다.

마치 광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지식증대로 이어진 것처럼, 광학기술이자 시각 예술로서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곧 아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령혼>에서 관객의 ‘보다’라는 행위가 ‘안다’라는 상태로 변환되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관객은 8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를 보지만 거기서 다뤄지는 역사의 실재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건 <사령혼>의 관심사가 단순히 지식 전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약진 운동에 관한 영화의 설명은 첫 쇼트의 문장 세 줄이 전부다. 그 다음 관객은 어떠한 예열도 없이 인터뷰를 마주하게 된다.

화면 안에는 오로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만이 있고, 카메라는 그 생존자의 비좁은 집 어딘가에서 자기 자리를 잡은 채 그의 지나온 시간을 들려 달라고 청할 뿐이다.

영화는 그 증언의 내용을 픽션으로 구성하려 하거나 자료화면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이미지를 구성하려 들지 않는다.

여기서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제시되기보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과거에 그들이 60년대 자볜거우에서 겪었던 일들을 환기함으로써 형성된다.

결국 <사령혼>에서 관객의 보는 행위가 난처함을 느끼는 것은 비가시적 요소, 생존자의 증언인 음성에 기인한다.

<사령혼>에서 다뤄지는 중국의 역사는 오로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환기되는데, 이 역사적 시간이 스크린 위에서 비가시적으로 제시되자 관객은 영화를 보는 행위에 난처함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관객은 시각 이미지를 통해 지식을 구성하던 방식에 차질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반대로 시각 이미지가 완전한 지식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시각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가 실재를 포획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한계를 인정하듯 <사령혼>은 가시적인 요소를 통해선 대약진 운동의 흔적만을 보여줄 뿐, 비가시적인 요소를 통해 그 역사에 다가가려 한다.

관객에게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겨진 영역은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또한 대상을 시각적으로 담는 매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빙은 생존자의 증언을 찍고 또 찍었다.

오로지 인터뷰와 청취를 통해서만 영화를 만드는 것이 왕빙 감독에게 있어서 최초의 시도는 아니다. 이미 그는 그의 두 번째 영화 <중국 여인의 일대기>를 허펑밍 할머니의 인터뷰만으로 만들었다.

증언과 청취로 만들어진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중국의 역사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왕빙 감독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대상처럼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있다.

이는 <사령혼>의 두 번째 인터뷰이인 저우즈난의 인터뷰 직후에 바로 알 수 있다. 저우즈난이 침대에 누워 간신히 말을 하는 상태로 인터뷰를 마치면 그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의 장례식을 마주하게 된다.

저우즈난 외에도 관객은 <사령혼>에 등장하는 자볜거우의 생존자들 인터뷰 이후 그들의 부고를 알리는 쇼트와 함께 방금 전 화면에서 인터뷰하던 그들이 사망했음을 알게 된다.

사라져가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영화로 담는 것. 영화는 심지어 대약진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거나 그 진위여부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생존자들이 겪었던 일을 경청하는 것이 <사령혼>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영화를 보고, 관객은 그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난처함을 느낀다. <사령혼>을 보고나서 관객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영화는 그 무엇을 발견하고 관객에게 보여주기보다는 지식으로서 역사와 관객 사이에 놓여있는 틈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령혼>은 시각적 이미지를 구성하지 않고 생존자의 증언과 실존을 담아내는 데 몰두한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는 틈. <사령혼>이라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 틈을 경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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