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 때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 추진되던 당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를 만들고,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단일팀을 만들자는 데 뜻밖에 반대 청원이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땀 흘려 준비한 선수들에게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부터 그동안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을 당연히 앞세우고, ‘대의’를 위해 ‘개인’은 희생을 감수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쨌건 공정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커진 것은 반길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절차적 공정성, 특히 수용자의 동의를 구하는 일은 중요한 과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정이란 단어가 꼭 바르게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인천국제공항을 필두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공정’의 문제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공정성, 투명성을 들어 정규직 노조가 비판하고, 심지어 취업준비생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시비까지 다양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간접고용이 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가 벌어지는 데 따른 사회적 해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애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공정성’이 사회적 강자의 반대 명분으로 소환된 것입니다.

얼마 전 의사들이 공공의대 문제 등을 놓고 파업할 때, 이때도 다시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가령 보건복지부가 ‘지역밀착성’을 중시하며 공공의대 1단계 전형에 ‘시도지사 등 지방정부 수장의 추천’을 넣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시민단체 자녀들을 의대에 보내기 위한 정책이 아니냐는 질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런 비판은 ‘의사로 일할 자격’보다 ‘의대에 들어올 자격’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대에 들어올 자격’이란 결국 수능성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능성적이 취약지역 근무, 필수의료 부문 복무, 주민과의 의사소통 등 다양한 자질과 요소에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공정’이 사회적 화두가 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불공정, 불투명이 그동안 우리 사회의 경쟁력과 신뢰도를 낮춰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강자의 방어논리로, 혹은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공정’이 동원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요?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것이 더 정의롭습니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지원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합니다. 낙후된 지역에 더 많은 예산을 지원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과정이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과 또한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연대’란 그런 것입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 그것이 사람의 길, 사회의 미래입니다.


** 윗 칼럼은 <광주문화방송>에  소개된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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