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 선생 소장품, 1981~2000년 민중미술 선봬
신경호 신창훈 이준석 하성흡 허달용 작품 25점
이달 17일부터 5월 18일까지...은암미술관 전시실
은암미술관(관장 채종기)은 이달 17일부터 5월 18일까지 제40주년 5·18광주민중항쟁을 맞아 ‘민중화(畵), 민주화(花)전"을 개최한다.
‘민중화(畵), 민주화(花)전'의 출품작은 평소 민중미술을 틈틈히 모아온 김상윤 선생(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의 소장 작품으로 이 중 제작연도가 1981년부터 2000년인 18명 작가의 작품 25점이 전시된다. (아래 전시 서문, 김상윤 선생 출품 소감문 참조)
출품작은 김경주, 박문종, 박석규, 박은용, 박철우, 서미라, 손장섭, 송필용, 신경호, 신창운, 유영열, 이사범, 이준석, 정희승, 주홍, 하성흡, 한희원, 허달용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됐다.
은암미술관은 "이번 전시는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가들이 민중의 삶에 나타난 소재를 작가들의 본질적인 반성에서 출발하여 색채의 간결함과 상징성을 미학적 개념으로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1980년 광주항쟁은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동네까지 뒤흔들어, 80년 오월을 현장에서 경험한 광주의 미술동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손장섭은 1981년 '5월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통해 광주의 아픔을 재구성했다.
신경호는 오월항쟁이 끝나자마자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을 그렸으나,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압수당했다.
신경호는 '1981년 광주항쟁 1주기 무렵 또 다시 '당신의 창' 이라는 작품을 그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드러냈다.
출품작들은 농민과 서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통한 건강성 회복, 산업사회의 문명적 비판과 현대 메커니즘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리얼리즘 형식과 포토몽타주 기법 그리고 다소 거친 표현주의 기법으로 묘사했다.
김상윤 선생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사회과학서점 '녹두서점'을 운영하면서 항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고문과 투옥돼기도 했다.
이후 김상윤 선생은 1987년 전남사회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이태호 교수 미술강의와 문화답사 등을 통해 민중미술작품을 접하게 됐다.
그는 홍성담 작가의 5월 판화집 새벽 을 시작으로 한희원, 송필용, 신경호, 박문종, 하성흡, 허달용, 주홍 작가 등 지역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하게 수집해왔다.
김상윤 선생은 “지금 나의 품에 남아 있는 작품들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중미술의 역사에서 소중하게 빛날 작품들은 이제 우리 지역사회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야 할 것”이라며 이번 민중미술 전시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채종기 은암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5·18민주화운동에 헌신하신 분들의 노고와 정신을 되새겨 보고, 대동 세상의 예술혼을 이루고자 노력하셨던 미술인들의 의지가 미술사에 길이 남겨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한편 은암미술관은 이달 19일까지 코로나 19 대응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휴관 중이어서 이달 17일부터 19일까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으로 선보인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종료되면 은암미술관에서 직접 관람이 가능하게 된다. (062)231~5299, 은암미술관.
전시 서문 박현일 은암미술관 학예실장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 특별전인 <민중畵, 민주花>展은 김상윤 선생님이 소장한 작품 중 제작연도가 1981년부터 2000년까지이며, 18명 작가의 작품 25점이 전시된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문득 2가지 옛날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1985년 <설땅>展을 기획하고 작가로 참여한 일이고. 전자와 후자 모두는 5.18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의식을 동반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전시회와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문화적 개념으로 볼 때, 20세기 말인 해(年)와 5.18민주화운동 20주년 해에 작성되었다. 이번 전시 <민중畵, 민주花>展은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가들이 민중의 삶에 나타난 소재를 작가들의 본질적인 반성에서 출발하고, 색채의 간결함과 상징성을 미학적 개념으로 표현했다. 구체적인 표현 방법으로는 농민과 서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통한 건강성 회복, 산업사회의 문명적 비판과 현대 메커니즘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리얼리즘 형식과 포토몽타주 기법 그리고 다소 거친 표현주의 기법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의 정신적 지주는 동시대의 구성원으로서 현대문명에 대한 현실적인 참여와 관심 그리고 비판적 시각이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중미술은 작가들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나라의 장래와 관련된 주제로 민족적 독자성과 고유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제강점기와 8․15 해방, 6․25 동란, 5․16 군사 쿠데타(coup d’état)와 유신독재 시대,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정치적 상황들을 사실주의․인상주의․표현주의․채색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민족미술은 민주주의의 역사의식을 동반한 작품과 작가들이 여기에 속하며, 민중미술과 민족미술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울타리에서 전개되었다. <민중畵, 민주花>展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화연(畵緣) 따라 30년 - 민중미술의 사실정신을 중심으로 김 상 윤(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1. 첫 인연 1980년 5월, 나는 윤상원과 함께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5월 17일 밤 11시 30분 경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에서 나온 4명의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505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아버지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기 위해 현당(玄堂) 김한영을 찾아가 수묵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80년대가 다 지나갈 무렵, 내가 운영하던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아버지에게 현당의 그림을 구해 드리기 시작했다. 2. 민중 미술인들과 인연을 맺다 1980년 이전, 녹두서점에서 판매하던 책에 오윤의 판화가 종종 등장했다. 책에 나오는 오윤의 판화를 보면서 미술을 통해 시대정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있었다. 1987년이던가, 내가 ‘전남사회문제연구소’를 만들었을 때, 홍성담이 5월 판화집 <새벽>을 만들어준 일이 있었다. 1980년대 말일까, 전남대 이태호 교수가 한국미술사를 강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1993년 어느 날, 이태호 교수가 한희원 전시를 구경해 보라고 권했다. 한희원의 첫 전시였는데, 서울 경인미술관에 이어 광주 인재아트센터에서도 전시 중이라고 했다. 작품들이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큰 학원을 경영하던 내 친구는 한희원의 <밤(200호)>을 구입했는데, 내가 그 작품을 몹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다른 그림과 바꾸어가도 좋다고 하였다. 1994년이었을 것이다.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송필용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송필용의 전시 경비를 지원한 대가로 100호나 되는 대작 <남녘의 땅>을 소장하게 되었다. 송필용의 작품을 처음으로 소장하게 된 셈이었다. 10년 가까이 이태호 교수와 함께 문화유산답사를 다녔다. 자연스럽게 이른바 민중미술을 하는 화가들과 동행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는 경우도 가끔씩 생겼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홍성담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매체연구소 구성원들은 현장을 중시하고 있어서,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전시하는 행위 자체를 백안시하고 있었다. 3. 도구인가 예술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그림에는 6.25 동족상잔을 그린 작품이 몇 점 되지 않는다. 1980년 광주항쟁은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동네까지 뒤흔들어, 그해 10월 서울에서는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홍성담에게 그리는 행위는 광주항쟁을 만천하에 알리는 무기이자 ‘도구’였다. 일부 보수적인 미술인들은 민중미술에 대해 ‘저것도 예술인가?’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리만 크지 도대체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었다. 예술을 변혁의 도구로 삼든 그렇지 않든, 그 작품이 예술품으로 살아남으려면 예술성을 획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작품이 주는 울림이 깊고 오래 가는 작품들을 구입한 것이다. 4. 아쉬움 내가 운영하는 회사는 작았지만 그래도 주식회사였기 때문에, 사장인 나도 봉급을 받아서 생활하였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정말 꼭 소장하고 싶었으나 구입하지 못한 작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호 작품은 거의 다 좋아했고, 박문종의 ‘우는 여자(150호 정도)’, 박철우의 ‘매 맞는 아이’, 이사범의 ‘낫질하는 아버지’, 하성흡의 ‘박승희 장례행렬도’, 허달용의 ‘하늘을 나는 독수리’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장품을 구입할 돈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구입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내가 작품을 소장하는 것은 이래저래 여러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내 소장품들은 광주전남 민중미술을 망라한 것이 결코 아니며, 광주전남 민중미술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전적으로 내 개인적 취향에 따라 나와 인연이 닿았을 뿐이다. 지금 나의 품에 남아 있는 작품들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미술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고, 민중미술의 역사에서 소중하게 빛날 작품들은 이제 우리 지역사회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박은용이나 유영열 그리고 주홍은 당시 민중미술을 하던 작가는 아니나 작품들이 사실정신을 담고 있어 몇 점 같이 전시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