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 선생 소장품, 1981~2000년 민중미술 선봬
신경호 신창훈 이준석 하성흡 허달용 작품 25점
이달 17일부터 5월 18일까지...은암미술관 전시실

은암미술관(관장 채종기)은 이달 17일부터 5월 18일까지 제40주년 5·18광주민중항쟁을 맞아 ‘민중화(畵), 민주화(花)전"을 개최한다.

‘민중화(畵), 민주화(花)전'의 출품작은 평소 민중미술을 틈틈히 모아온 김상윤 선생(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의 소장 작품으로 이 중 제작연도가 1981년부터 2000년인 18명 작가의 작품 25점이 전시된다. (아래 전시 서문, 김상윤 선생 출품 소감문 참조)

신경호- 당신의 창, 134x132cm 1981 캔버스에 아크릴.
신경호- 당신의 창, 134x132cm 1981 캔버스에 아크릴. ⓒ김상윤 소장
이준석-화엄광주, 190x160cm 유채 1996.
이준석-화엄광주, 190x160cm 유채 1996. ⓒ김상윤 소장

출품작은 김경주, 박문종, 박석규, 박은용, 박철우, 서미라, 손장섭, 송필용, 신경호, 신창운, 유영열, 이사범, 이준석, 정희승, 주홍, 하성흡, 한희원, 허달용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됐다.

은암미술관은 "이번 전시는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가들이 민중의 삶에 나타난 소재를 작가들의 본질적인 반성에서 출발하여 색채의 간결함과 상징성을 미학적 개념으로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1980년 광주항쟁은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동네까지 뒤흔들어, 80년 오월을 현장에서 경험한 광주의 미술동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손장섭- 광주의 어머니, 72.7x60.6cm 1981 유채.
손장섭- 광주의 어머니, 72.7x60.6cm 1981 유채. ⓒ김상윤 소장

손장섭은 1981년 '5월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통해 광주의 아픔을 재구성했다.

신경호는 오월항쟁이 끝나자마자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을 그렸으나,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압수당했다.

신경호는 '1981년 광주항쟁 1주기 무렵 또 다시 '당신의 창' 이라는 작품을 그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드러냈다.

출품작들은 농민과 서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통한 건강성 회복, 산업사회의 문명적 비판과 현대 메커니즘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리얼리즘 형식과 포토몽타주 기법 그리고 다소 거친 표현주의 기법으로 묘사했다. 

하성흡-호미질하는 할머니, 44x63cm 한지에 수묵 채색.
하성흡-호미질하는 할머니, 44x63cm 한지에 수묵 채색. ⓒ김상윤 소장

김상윤 선생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사회과학서점 '녹두서점'을 운영하면서 항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고문과 투옥돼기도 했다.

이후 김상윤 선생은 1987년 전남사회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이태호 교수 미술강의와 문화답사 등을 통해 민중미술작품을 접하게 됐다.

그는 홍성담 작가의 5월 판화집 새벽 을 시작으로 한희원, 송필용, 신경호, 박문종, 하성흡, 허달용, 주홍 작가 등 지역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하게 수집해왔다.

새벽, 90cmx180cm,캔버스에 먹과 흙,1999.
신창운- 새벽, 90cmx180cm,캔버스에 먹과 흙,1999. ⓒ김상윤 소장

김상윤 선생은 “지금 나의 품에 남아 있는 작품들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중미술의 역사에서 소중하게 빛날 작품들은 이제 우리 지역사회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야 할 것”이라며 이번 민중미술 전시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채종기 은암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5·18민주화운동에 헌신하신 분들의 노고와 정신을 되새겨 보고, 대동 세상의 예술혼을 이루고자 노력하셨던 미술인들의 의지가 미술사에 길이 남겨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허달용-거름내기 살아오는 오월, 214x71.5cm 한지 수묵 1995. ⓒ김상윤 소장
허달용-거름내기 살아오는 오월, 214x71.5cm 한지 수묵 1995. ⓒ김상윤 소장

 

다랑치논, 54cmx73cm,한지에 수묵담채,1994.
김경주- 다랑치논, 54cmx73cm,한지에 수묵담채,1994. ⓒ김상윤 소장

한편 은암미술관은 이달 19일까지 코로나 19 대응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휴관 중이어서 이달 17일부터 19일까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으로 선보인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종료되면 은암미술관에서 직접 관람이 가능하게 된다. (062)231~5299, 은암미술관. 

 

전시 서문

박현일 은암미술관 학예실장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 특별전인 <민중畵, 민주花>展은 김상윤 선생님이 소장한 작품 중 제작연도가 1981년부터 2000년까지이며, 18명 작가의 작품 25점이 전시된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문득 2가지 옛날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1985년 <설땅>展을 기획하고 작가로 참여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미술에 대한 보고서: 부정했던 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집필한 논문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는 5.18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의식을 동반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전시회와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문화적 개념으로 볼 때, 20세기 말인 해(年)와 5.18민주화운동 20주년 해에 작성되었다.

이번 전시 <민중畵, 민주花>展은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가들이 민중의 삶에 나타난 소재를 작가들의 본질적인 반성에서 출발하고, 색채의 간결함과 상징성을 미학적 개념으로 표현했다.

구체적인 표현 방법으로는 농민과 서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통한 건강성 회복, 산업사회의 문명적 비판과 현대 메커니즘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리얼리즘 형식과 포토몽타주 기법 그리고 다소 거친 표현주의 기법으로 묘사되었다.

기존 미술 집단의 조형 형식과 질서를 깬 회화적 기법을 보여준 작품도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의 정신적 지주는 동시대의 구성원으로서 현대문명에 대한 현실적인 참여와 관심 그리고 비판적 시각이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중미술은 작가들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나라의 장래와 관련된 주제로 민족적 독자성과 고유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제강점기와 8․15 해방, 6․25 동란, 5․16 군사 쿠데타(coup d’état)와 유신독재 시대,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정치적 상황들을 사실주의․인상주의․표현주의․채색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민족미술은 민주주의의 역사의식을 동반한 작품과 작가들이 여기에 속하며, 민중미술과 민족미술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울타리에서 전개되었다.

<민중畵, 민주花>展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화연(畵緣) 따라 30년

- 민중미술의 사실정신을 중심으로

김 상 윤(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1. 첫 인연

1980년 5월, 나는 윤상원과 함께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5월 17일 밤 11시 30분 경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에서 나온 4명의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505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5월 27일 상황이 종료된 뒤, 아내와 처제,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우리 집은 다섯 사람이 합동수사단에 체포되었고, 녹두서점은 내 아버지가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6.25 당시 우리 집은 여덟 식구가 죽는 참화를 입었는데, 아버지는 아마 참혹했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기 위해 현당(玄堂) 김한영을 찾아가 수묵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현당 김한영은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서, 조선미술전람회에 몇 번 입선한 적이 있는 이른바 ‘선전작가’(鮮展作家)였다.

그는 고사인물도나 기명절지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노안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버지는 원래 그림 재주가 있었지만, 수묵 그림은 아마 처음 그려 보았을 것 같다. 그림 공부는 당연히 도제식 공부여서 스승의 그림을 보고 흉내 내는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1980년대가 다 지나갈 무렵, 내가 운영하던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아버지에게 현당의 그림을 구해 드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현당의 그림을 구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치나 의재 남농 같은 대가들의 그림도 눈에 들어왔다. 궁동 예술의 거리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숙해진 화랑들도 많아졌다.

이제 아버지에게 그림을 사다 드리는 일보다, 사업 때문에 운동권에서 멀어진 허전함을 그림을 보고 소장하는 일로 채우게 된 셈이었다.

2. 민중 미술인들과 인연을 맺다

1980년 이전, 녹두서점에서 판매하던 책에 오윤의 판화가 종종 등장했다. 책에 나오는 오윤의 판화를 보면서 미술을 통해 시대정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있었다.

1987년이던가, 내가 ‘전남사회문제연구소’를 만들었을 때, 홍성담이 5월 판화집 <새벽>을 만들어준 일이 있었다.

홍성담의 5월 판화집은 목판화 50점으로 오월항쟁을 재현해 놓은 것이었는데, 무려 50권이나 만들어 우리에게 가져왔다.

50점이 들어가는 판화집 50권을 만들려면 2,500장의 목판화를 찍어야 하고 또 잘 말려야 했으니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홍성담은 자신이 주도하여 결성한 ‘시각매체연구소’ 후배들과 함께 작업하였을 것이다.

1980년대 말일까, 전남대 이태호 교수가 한국미술사를 강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화랑 주인 몇 분과 함께 이태호 교수 강의를 들었는데, 민중미술에 관련된 젊은 화가들도 여러 명 강의를 들으러 왔다.

이태호 교수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들은 후, 중앙일보에서 나온 <한국의 미> 전집을 구입해 24권 전부를 밑줄 그어가며 독파했다.

물론 다른 책들도 구입해 읽으니 서가에 미술 관련 책들이 쌓이고 또 쌓였다.

1993년 어느 날, 이태호 교수가 한희원 전시를 구경해 보라고 권했다. 한희원의 첫 전시였는데, 서울 경인미술관에 이어 광주 인재아트센터에서도 전시 중이라고 했다. 작품들이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때까지 주로 전통적 서화들만 수집하고 있어서, 홍성담 판화집을 제외하면 미술문화운동을 하는 작가의 그림을 직접 구입한 적은 없었다.

이태호 교수의 추천으로 나는 한희원의 <정미소>라는 작품을 구입하였다. 민중미술 작가의 그림을 처음으로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큰 학원을 경영하던 내 친구는 한희원의 <밤(200호)>을 구입했는데, 내가 그 작품을 몹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다른 그림과 바꾸어가도 좋다고 하였다.

나는 어느 대가의 그림 한 점을 주고 한희원의 <밤>도 가져왔다. 나는 한희원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고, 한때는 한희원의 명품은 내가 다 가져간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1994년이었을 것이다.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송필용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그는 전시 일정이 잡혀 있는데 혹시 전시 경비를 지원받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해 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며칠 후 담양 대덕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송필용의 그림 창고에는 많은 작품이 쌓여 있었고, 벽에는 커다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나는 김지하의 ‘황톳길’이라는 시가 떠오르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송필용의 전시 경비를 지원한 대가로 100호나 되는 대작 <남녘의 땅>을 소장하게 되었다. 송필용의 작품을 처음으로 소장하게 된 셈이었다.

10년 가까이 이태호 교수와 함께 문화유산답사를 다녔다. 자연스럽게 이른바 민중미술을 하는 화가들과 동행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는 경우도 가끔씩 생겼다.

이사범 선생이나 신경호 교수처럼 동년배도 있었지만, 대부분 후배 또래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구성원들인데, 일부는 불로동 다리(부동교) 건너 일본식 건물에 떼로 모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시인 곽재구 역시 그곳에서 함께 글을 쓰면서 의기투합하던 패거리였고, 이세길은 미술평론으로 한몫을 했으며, 정희승은 당시 불로동다리 주변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홍성담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매체연구소 구성원들은 현장을 중시하고 있어서,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전시하는 행위 자체를 백안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과 호흡하기 좋은 판화 작업과 병행하여, 대형 걸개그림들을 가지고 현장을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의 소장품에 시각매체연구소 구성원들의 작품이 거의 없는 이유는 현장을 중시하는 그들의 작업 태도 때문이었다.

3. 도구인가 예술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그림에는 6.25 동족상잔을 그린 작품이 몇 점 되지 않는다.

4.19 혁명을 그린 작품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손장섭이 그린 ‘사월의 함성’이란 작품 한 점이 있을 뿐이다.

문학 동네가 민족상잔이나 현실 문제에 격렬히 반응한데 비해, 미술 동네는 시대적 색맹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은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동네까지 뒤흔들어, 그해 10월 서울에서는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80년 오월을 현장에서 경험한 광주의 미술 동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강연균은 1980년 ‘하늘과 땅 사이’를 그렸고, 서울에 있던 손장섭은 1980년 ‘오월함성’과 1981년 ‘5월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통해 광주의 아픔을 재구성했다.

신경호 역시 오월항쟁이 끝나자마자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을 그렸으나, 불온하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서 압수해 갔다.

신경호는 1981년 광주항쟁 1주기 무렵 또 다시 ‘당신의 창’이라는 작품을 그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드러냈다.

앞서 말한 대로 홍성담은 오월항쟁을 50점의 목판화로 새겨 광주항쟁을 전면화시켰다.

홍성담에게 그리는 행위는 광주항쟁을 만천하에 알리는 무기이자 ‘도구’였다.

많은 미술인이 그런 미술운동에 동참하였고, ‘민족미술협의회’에 이어 1988년에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 결성되었다. 이른바 민중미술이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큰 흐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도 일군의 미술인들이 그해 10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를 결성하여 이듬해부터 ‘오월전’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현실에 대한 관심이 사실정신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 미술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시대정신과 함께 진행된 민중미술운동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민중미술 15년 전’(1980~1994)을 전환점으로 제도화되면서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일부 보수적인 미술인들은 민중미술에 대해 ‘저것도 예술인가?’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리만 크지 도대체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었다.

민중미술이 젊은 예술가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면서 실제 목소리만 크지 회화성이 떨어지는 작품들도 있었을 것이다.

‘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는다’는 시대 의식이 앞서다 보니 시행착오 역시 많았을 것이다.

예술을 변혁의 도구로 삼든 그렇지 않든, 그 작품이 예술품으로 살아남으려면 예술성을 획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소장품을 구할 때 시대와 호흡하는 작품을 고르되, 회화적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작품을 주로 구입하였다.

비록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작품이 주는 울림이 깊고 오래 가는 작품들을 구입한 것이다.

나의 소장품은 그래서 ‘저런 그림도 민중미술인가?’ 여겨지는 작품들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런 작품도 찬찬히 뜯어보면 작지 않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아쉬움

내가 운영하는 회사는 작았지만 그래도 주식회사였기 때문에, 사장인 나도 봉급을 받아서 생활하였다.

나는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취미생활을 극도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골프나 당구를 쳐본 적 없고, 바둑 두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정말 꼭 소장하고 싶었으나 구입하지 못한 작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호 작품은 거의 다 좋아했고, 박문종의 ‘우는 여자(150호 정도)’, 박철우의 ‘매 맞는 아이’, 이사범의 ‘낫질하는 아버지’, 하성흡의 ‘박승희 장례행렬도’, 허달용의 ‘하늘을 나는 독수리’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장품을 구입할 돈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구입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내가 작품을 소장하는 것은 이래저래 여러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은, 구입을 했으나 내 품을 떠나버린 작품들도 일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내 소장품들은 광주전남 민중미술을 망라한 것이 결코 아니며, 광주전남 민중미술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전적으로 내 개인적 취향에 따라 나와 인연이 닿았을 뿐이다.

내 소장품은 광주전남 민중미술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내 소장품보다 훨씬 메시지가 강하고 전투적인 많은 작품이 여러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품에 남아 있는 작품들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미술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고, 민중미술의 역사에서 소중하게 빛날 작품들은 이제 우리 지역사회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1981년부터 1999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만 간추려 전시하게 된 것이다. 민중미술이 싹터서 가장 치열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만 선별한 것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이외에도 당대를 대표할 작품들이 아주 많다고 알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같은 공적 기관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모두 수집하여 우리 지역의 문화 자산으로 남겼으면 참 좋겠다.

박은용이나 유영열 그리고 주홍은 당시 민중미술을 하던 작가는 아니나 작품들이 사실정신을 담고 있어 몇 점 같이 전시하게 되었다.

다만, 선배들을 이어 지금도 사실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하고 있는 정선휘나 박수만 같은 후배들의 작품 다수가 함께 전시되지 못해 참으로 아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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