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전문]

성교육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성평등교육조차 성범죄로 내모는 공교육이 무슨 수로 N번방을 막을 것인가? 
 

아동 성착취를 일삼은 N번방 사건 주모자 조주빈(일명 ‘박사’)이 구속되면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N번방 등 텔레그램 내 성착취물 공유방에 입장한 자가 26 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N번방에서는 ‘강간하자’는 말을 인사로 주고 받았으며, 동시접속자가 최대 1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한다.

주모자뿐 아니라, 수십만 접속자는 강력하게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생명을 착취하는 현장을 은밀한 음욕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가속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1일 광주광역시교육청 앞에서 '배이상헌 선생의 직위 해제 철회와 시교육청의 행태 규탄 기자회견' 중에 배이상헌 교사(오른쪽에서 두번째) 가 발언 하고 있다. ⓒ광주인
지난해 11월 11일 광주광역시교육청 앞에서 '배이상헌 선생의 직위 해제 철회와 시교육청의 행태 규탄 기자회견' 중에 배이상헌 교사(오른쪽에서 두번째) 가 발언 하고 있다. ⓒ광주인

그러나, 이들을 응징하는 것이 끝이어선 안 된다. 응징은 계속되었지만, ‘정준영’으로 일어났던 일은 다시 ‘박사’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26만명의 예비 박사들은 일상 곳곳에서 언제든 N번방의 괴물로 살아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괴물들이 만들어지는 토양을 갈아엎는 성교육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대한민국은 예민한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기 힘든 사회이다. 성폭력, 성희롱, 성접대 사건은 물론 여성을 수단화하는 담론이 일상적이다.

광장이냐 일상이냐에 따라 ‘성’을 대하는 방식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 모럴 사회인 것이다.

도덕 교사 배이상헌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성 불평등, 성 엄숙주의를 풀려는 수업 언어조차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신고되면 성범죄로 취급할 정도로 결벽증과 엄숙성이 공적 세계를 지배한다.

광장에서는 잘못된 성을 바로잡는 언어마저 내쫓고, 밀실에서는 괴물들의 눈이 번뜩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나라의 공식 성교육 커리큘럼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고집하고 있다.

교과서 삽화나 기술방식, 개념 정리 등도 이와 같은 금욕적, 보수적 성 보호 관점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N번방 사건에서도 ‘여학생들이 애초 돈 벌려고 했던 거 아니야?’(보호할만한 순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독일 현대 교육의 토대를 만든 철학자 아도르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은 부조리,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 차별에 대해 분노하고 대항할 수 없으며, 권력 앞에서 굴종적인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약한 자아를 만드는 주범이 바로 ‘성교육 표준안’과 같은 담론이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자기 몸을 꾸미는 일, 성적 주체로 사는 일에 죄의식을 갖도록 내몰리고 있으며, 엄숙주의와 도덕주의로 자신을 검열하는 데 익숙하다.

죄의식을 체계적으로 내면화함으로써 자아는 축소되는 한편,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는 인간,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기 힘든 인간으로 자라게 된다.

또한, 자기 성기의 노예로 전락하는 한편, 다른 생명을 무참하게 짓밟고 착취하는 현장에 분노하고 대항하기는커녕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동참하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성교육은 약한 자아를 누르는 고리를 끊고, 강한 자아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교육은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 시민교육이다.

배이상헌이 수업 중 상영한 프랑스 단편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학생들이 나오는 건 지금의 성교육 풍토와 대한민국의 이중 모랄 속에서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런 성적 수치심을 보호한다면서 교사를 수사기관에 넘기는 일이 과연 학생을 성적 주체로 인정하고, 강한 자아를 기르는 일인가?

성이 일상적으로 착취되기 쉬운 세상을 만드는 바로 그 태도로 결코 성불평등한 세상을 바로 잡을 수는 없다.

배이상헌이 직위 해제된 지 이제 8달이 되었고, 교육청 앞 피켓 시위는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교육청은 변함이 없고, 검찰은 머뭇거리고 있다. 이에 우리는 교육감과 교육 당국자에게 다시 요구하는 바이다.
 

_ 단단한 인권존중의 토대 위에서 성담론이 활발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교육기반을 마련하라.
_ 왜곡된 성윤리를 바로 잡는 수업을 북돋우고, 교육권을 보장하라.
_ 신고만 해도 처벌하는 폭력 행정을 사죄하고, 직위해제를 즉각 취소하라.
_ 교육청은 지금이라도 교육적 해결 의지를 밝히고, 수사 중단을 즉각 촉구하라.

2020. 4. 3

성평등교육과 배이상헌을 지키는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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