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팽로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의 최초 의병이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옥과로 내려오는 길에 순창에서 부랑배 500명을 설득해 의병을 조직했다.

그리고 곡성, 순천, 동복, 화순, 담양, 광주, 창평, 장성, 정읍 등지에서도 의병을 모집했다. 양대박은 1592년 4월 17일 동래성 함락 소식을 듣고 남원에서 의병 모집을 시작했다.

고경명 의병장.
고경명 의병장.

같은 해 5월 15일 남원에서 유팽로를 만나 거사를 논의했다. 이 무렵 광주 출신인 고경명은 60세의 나이로 의병을 모집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유팽로, 양대박, 고경명은 1592년 5월 24일 담양에서 만나 군사를 합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8일 이들은 담양에서 회맹의식을 갖고 고경명을 대장, 유팽로를 좌부장, 양대박을 우부장으로 하는 담양회맹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은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호남 의병은 타지역의 의병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타지역의 의병이 향보적(고향을 사수하는) 성격인데 반해 호남 의병은 근왕적(군대와 함께하는) 성격을 띄었다. 그래서 호남 의병은 열성적으로 경상도에 진출해 적과 싸웠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본격적인 한말 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척사파 유생들이 주도한 한말 의병항쟁 당시 호남에서는 노사 기정진 계열의 유생들이 선봉에 섰는데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평민의병장과 평민의병이 주를 이루던 의병항쟁에 해산 군인이 합세한 시점은 러일전쟁 이후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군대에 의한 본격적인 의병 토벌이 시작되었다.

구한말 의병장들. ⓒ광주아트가이드
구한말 의병장들. ⓒ광주아트가이드

일본의 호남 의병에 대한 토벌은 타지역 의병에 대한 토벌보다 거셌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에 대패한 경험이 있고, 호남 의병이 타지역의 의병보다 잘 조직되었고 끈질기게 저항했던 탓이었다.

일본은 1907년 8월부터 1909년 6월까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대에서 대대적인 의병 토벌에 나섰다.

대부분의 의병들이 일본의 총칼 앞에 쓰러졌지만 호남 의병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이에 일본은 1909년 5월 ‘임시한국파견대’를 전라도에 투입했다.

‘임시한국파견대’는 기존의 일본군의 위력을 훨씬 뛰어넘는 특수부대였다.

이들은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서해와 남해에 군함을 띄워놓고 전라북도부터 포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며 호남 의병을 말살했다.

그 결과 사망자 1만 7천여 명, 부상자 370여 명, 포로 2,100여 명이 발생했다.

호남 의병 말살 이후 한말 의병투쟁은 쇠퇴해갔다. 남은 의병들은 황해도 일대에 모여 거사를 꾀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14년 의병장 채응언이 체포되면서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전후 국내의 거점을 잃은 의병들은 만주, 연해주 등 해외로 자리를 옮겨 항일 투쟁을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의병들은 점차 독립군으로 변해갔다.

한말의 호남 의병은 타지역의 의병과 달리 지속적으로 봉기했다. 또한 타지역에 비해 의병세력의 토착적 기반이 강했고, 주민들과 의병들의 관계가 긴밀했다.

영화 ‘김군’은 2019년 5월 23일에 개봉했다. 지만원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며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에 찍힌 광주시민과 시민군을 북한군 특수부대라고 주장했다.

‘김군’은 지만원이 북한군 특수부대라고 지목한 한 시민군의 행적을 쫓는 영화다. 추적결과 지만원이 지목한 시민군은 김군이라고 불리던 청년이었다.

1980년 5월 24일 계엄군들은 지금의 광주대학교 인근에서 서로 간에 오인사격을 했다. 이후 계엄군은 오인사격에 대한 화풀이로 인근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하는데 김군 역시 이때 숨을 거둔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김군'.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김군'.

김군의 지인들을 통해 밝혀진 김군의 정체는 고아였다. 김군은 학동 인근의 다리 밑에서 살며 쓰레기나 고물을 주워 팔았던 청년이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잃을 것 없는 힘없는 자로서 그래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던 김군들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한말 때처럼 또 한 번 수많은 무명씨들이 의병(시민군)으로 나섰던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에 5·18민주화운동의 의병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의리’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는 ‘남남끼리 혈족을 맺는 일’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한말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의 호남 의병의 모습 속에서 ‘의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 시 호남 의병은 적을 피하라는 이순신 장군의 명령에도 명량 인근에서 군량이나 군복을 조달하거나 피난선을 이용해 세력이 강하게 보이는 등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동아’라는 열매를 조달해 조선 수군의 갈증을 풀어주었고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셔 일본군의 총알을 막았다.

그리고 호남 의병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자신들의 힘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일본에 맞서 싸웠다.

목숨보다 사람의 도리를 중시여기고 모르는 이도 조건 없이 도왔던 임진왜란 시 호남 의병은 의리의 표본이다.

한말 호남 의병도 마찬가지다. 의병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들은 의병들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호남 의병에 대한 탄압은 그 어느 지역보다 혹독했음에도 호남 의병들은 일본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김군과 같은 5·18민주화운동의 의병은 어떠한가.

남이었지만 국가폭력에 무참하게 짓밟히는 사람들을 보고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도청에 남아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광주의 문화정체성은 다름 아닌 ‘의리’라고 말이다.

광주의 ‘의리’는 비단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한 달 후 광주에서는 34주기 5·18민주화운동 전야제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광주는 세월호의 아픔을 끌어안았다. 전국에서 처음이었고, 또한 자발적이었다. 이준석 선장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 광주법원 인근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매주 이준석 선장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광주를 찾은 세월호 유가족을 광주시민들은 노란색 옷을 입고 노란 띠를 두른 체 말없이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은 ‘세월호 시민 상주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광주의 오월 어머니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위로를 건네며 함께 울었다.

2016년 여름 세월호 유가족은 또 다른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를 찾았고 이후 백남기 농민 대책위원회와 연대했다.

그리고 최근 세월호 유가족은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펼쳤다. 광주의 ‘의리’는 이렇게 현재에도 진행 중이며 미래에도 계승 될 소중한 가치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래전부터 광주는 스스로를 ‘의향’의 도시라 규정하고 있다. ‘예향’과 ‘미향’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말이다.

‘예향’은 비엔날레라는 대표적인 실체로 구현되었다. ‘미향’은 광주 10미를 비롯해 세계김치연구소와 남도향토음식박물관 등의 실체로 구현되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하지만 ‘의향’은 어떠한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광주는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이렇게도 뚜렷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가치임에도 ‘의향’ 즉 광주에 녹아있는 ‘의리’라는 가치는 지금껏 이렇다 할 실체를 갖추지 못한 실정이다.

광주를 ‘아시아의 문화수도’로 만들겠다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이 10년 넘게 진행되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가시적 실체를 제외하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은 시민들의 피부에 닿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그 행사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제안한다.

광주에 녹아있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의리’라는 가치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에 담을 것을 말이다.

건물과 행사만 난무하지 아직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에는 사업의 모든 것을 묶는 거대 담론이 미비한 실정이니.
 

** 윗 글은 (광주아트가이드) 122호(2020년 1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http://cafe.naver.com/gwangjuart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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