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서울의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 해산은 성급했던 결정
‘조국 사태’에서 보듯 학벌주의를 기반으로 한 불평등, 세습 구조 고착화

10월 8일,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광주) 새로운 선언문 심의
‘학벌주의’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이를 넘어서기 위한 시민운동은 계속될 것

2016년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는 ‘자본독점 앞에 학벌독점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며, 해산했다.

학벌에 의한 차별 양상이 달라졌을 뿐인데, 운동의 이유가 없어졌다고 오판한 것이다.

그러나 학벌주의는 여전히 우리 일상에 뿌리 깊게 남아 사회 양극화의 명분이 되거나, 서울-지방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학벌없는사회 제공
ⓒ학벌없는사회 제공

학벌없는사회를위한시민모임은 2016년의 해산 선언문을 극복하고 학벌타파 운동의 당위를 확인하기 위해 10월 8일 회원의날 토론을 거쳐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선언’을 심의했다.

사전행사에서는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되돌아보다’를 주제로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서울) 채효정 전 사무처장과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광주) 박고형준 상임활동가의 토론발표가 있었다.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서울)의 창립, 성장, 소멸, 해산 과정이 생생하게 증언되었으며,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난관과 과제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울러 학벌없는사회를위한시민모임(광주)의 활동과정에 대해서도 다루어졌다.

조국 전 법무장관 관련 쟁점도 언급되었으며, 이를 통해 여전히 학벌주의가 차별과 세습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벌주의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입시 공정성’만으로 이런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최종 심의를 거쳐 우리는 오늘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선언’을 발표하는 바이다.

학벌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학벌타파를 위한 시민운동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모든 시민이 학벌타파 운동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2019년 10월 22일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선언 [전문]

서문

봉건 시대가 끝나고 문벌 집단은 해체되었지만, 학벌은 곧 그 자리를 차지한 후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학벌은 공화국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인 평등교육과 민주교육을 흔들며, 부자, 엘리트, 서울의 지배를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학벌주의는 입시성적이 곧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것이라는 미신을 퍼뜨려 지배층의 권력 독점과 자본 세습을 정당화한다.

그런 점에서 2016년,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의 해산은 섣부른 것이었다.

이들은 2000년대 이후로 가파르게 치솟은 대졸자 실업률, 청년들의 실업난을 목격하면서, 소위 명문대학 졸업장조차 더는 피라미드 위쪽을 보장하는 사다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며, 학벌없는 사회 운동이 그 쓸모를 다 했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질수록, 소위 ‘스카이(SKY)’로 대표되는 학벌의 힘이 고소득 전문직종 진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과 취업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대학졸업장이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기본 입장권이 되어 가난한 부모의 고혈을 쥐어짜고 청년들에게 학자금을 부채로 떠안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벌주의에 따른 대학 위계는 갈수록 첨예해졌고, 출신 대학에 따른 차별, 임금 격차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는 대학의 양극화가 사회 신분 양극화의 기반임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학벌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 한, 학벌없는사회를 향한 시민운동도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선언하려 한다.

이 선언에서는 학벌로 말미암은 많은 병폐 중 교육 문제와 권력 문제를 되짚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반복되는 교육개혁 실패

한국의 입시중심 교육은 초중등교육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초중등 교육에 대한 정책토론과 모범사례 연구는 많지만 그 모든 시도와 상상은 결국 대학 입시 앞에서 멈춘다.

국가권력기반은 민주화되었는데, 정작 민주주의를 책임 있게 운영할 시민을 기르는 민주시민교육은 들어서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간의 정책들이 모두 ‘서열’이라는 모순은 건드리지 않은 채 입시제도 개선 여부의 좁은 틀 안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학벌에 대한 환상, 이에 기반을 둔 대학 서열체제가 개혁되지 않는 한 기득권 대학이 정한 선발기준에 초중등 교육과정이 장단을 맞추는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학벌주의로 병드는 것은 비단 초중등교육 뿐만이 아니다. 한국 대학은 학위장사를 하는 곳으로 전락하여 교양강의, 대형강의 위주의 질 낮은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학생이 항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학생들 역시 학위 취득이 주 목적일 뿐, 전공 지식이나 기술을 연마하려는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은 ‘교육’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학위를 상품으로 팔게 되며, 거래의 결과 대학에는 수익을, 부모와 학생에겐 등록금 부채를 남길 뿐이다. 학벌주의 풍토에서 고등교육 역시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한편, 대학은 사회, 국가 공동체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과제나 교육과정을 기획하는 능력은 잃어가는 대신 대학평가에서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한 공모사업, 전시 행사에 골몰하고 있다.

어차피 학문을 연구하는 내공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수치화된 실적으로 대학 서열을 높이기 위한 천박한 장삿속만 판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연구 윤리는 세계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학벌에 의한 권력독점

학벌은 소속 대학을 매개로 한국사회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물론,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은 어느 나라나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특정 대학 출신이 고위 공직을 압도적으로 독점하거나 이토록 상위권 대학 출신자들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곳은 흔치 않다.

서울대의 독점을 정점으로 출신대학에 따라 신분을 가르고, 개인의 능력을 그 신분에 따라 평가하는 관습이 우리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1대부터 20대 국회까지 당선된 역대 지역구 국회의원 중 1/3은 서울대 출신이었으며 SKY를 합치면 과반수를 차지한다.

법조계의 독점은 더욱 심각한데 1948년부터 2015년 사이 역대 대법관의 70%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다.

2018년 100대 기업 CEO의 1/3 이상도 서울대출신이며 SKY를 합치면 과반수이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에 의한 권력 독점은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부유층 자녀들의 고학벌 대학 진학이 계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벌이 더는 권력세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과거보다 조금 완화된 부분을 과장한 것이거나 과거와 다른 모습의 병폐를 보지 못한 탓이다.

또한, 학벌주의는 빈부격차, 서울중심주의를 심화하고 정당화한다. 자본으로 얻은 학벌을 이용해 다시 자본을 얻는 순환구조는 부의 세습을 은폐한다.

지방대학은 지역의 독자적인 전망과 그에 따른 학문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갖춘 곳이 아니라 서울 진출에 탈락한 사람들의 대기소, 수용소로 취급된다.

학생과 교원들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서울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같은 입시 체제 안에서 평등한 시민사회는 요원해지며, 시민들은 스스로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한편, 부당한 지배와 복종을 내면화한다.

심지어 학벌주의는 시민사회의 건강한 생태계마저 위협하고 있다. 시민 사회의 운동으로 성취된 가치는 수많은 시민들이 노력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학벌 좋은 명망가를 수식하는 경력으로 전락하곤 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청년 세대의 분노와 고통에 편견 없이 귀를 열기보다 소위 명문대학 청년 세대가 발언을 독점하고, 그 발언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한다.

그 안에서 학벌없는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학벌주의에 대한 비통함은 더욱 무거워진다.

학벌타파운동의 과제

많은 사람들이 학벌의 폐해를 개탄하면서도 정작 학벌없는사회가 될 가능성을 믿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차별은 인간이 없앨 수 있다.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것 같다고 시민사회 운동이 스스로 학벌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닫아서야 되겠는가.

오히려 더욱 꼼꼼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벌없는사회가 가랑비에 옷 젖듯 실현될 것임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

학벌타파 운동은 학벌주의로 곪아 터진 교육현장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학 평준화와 등록금 철폐를 통한 교육개혁, 사립 교육 기관의 공영화와 교육 공공성 강화 등 다양한 교육운동의 실천을 펼쳐나갈 것이다.

학벌타파 운동은 학벌에 기대 권력을 만드는 자리를 막아설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을 통한 출신학교 차별 철폐, 일부 대학 출신자들의 고위공직 독점 모니터링 등을 비롯해 제반 인권운동, 정치운동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시민 사회와 시민운동 내부의 학벌 문제도 지나쳐서는 안된다. 학벌타파 운동은 학연과 지연이 아닌 평등한 시민 관계를 기반으로 시민운동을 재조직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병이 존재하는 한 이를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듯, 학벌의 병폐가 존재하는 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학벌없는 사회 운동이 끝났다’는 2016년 (사)학벌없는사회의 해체선언을 넘어서고자 하며, 오늘 다시 학벌없는사회를 위해 부지런히 투쟁할 것임을 선언한다.

2019년 10월 8일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토론회 참석자 일동

※ 참고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는 1998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1999년 ‘함께하는 시민행동’이라는 시민단체의 분과단체인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행동’을 거치고 2001년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나 2016년 해산했다.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2008년부터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으로 시작하여 2011년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으로 정식출범하였고 2019년 정기총회에서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으로 명칭을 변경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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