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징용자 김일수(金一秀)가 선두에 활동 드러나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의 지원으로 노동운동 지도자로 거듭나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일본 아키타현 연구에서 밝혀

해방 직후 일본 내 아키타현에서 한중일 노동자들이 연대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는 관련 연구에 천착해온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가 16일 내용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해방 전 이 지역 하나오카 광산에서 한중일 노동자가 서로 음식물을 떨구기도 하고 일본제국주의와 회사 측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등 연대한 사실에 대해선 김 교수의 논문 등을 통해 국내에 알려진 바 있다.

1950년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 현장을 방문한 김일수.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제공
1950년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 현장을 방문한 김일수.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제공

그러나 그 뜻과 의의를 살려 해방 직후에도 그러한 연대활동이 이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해방 전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그 활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가 최근 이런 사실을 접하게 된 것은, 조선인 징용자였으며 1947년 설립된 하나오카 자유노조의 서기장이었던 조선인 이우봉(李又鳳)이 쓴 증언록 <재일 1세가 증언한다>('재일 1세가 증언한다' 출판사, 2002)를 입수해 그 내용을 확인하면서부터다.

그동안 이 증언록은 시판되지 않았기에 관련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김 교수가 광주지역 일간지에 연재중인 기획을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일본 민족예술연구소 전 소장 차타니 주로크 씨에게 입수하게 된 것.

조선인 중에서 핵심인물은 하나오카에서 귀국하지 않고 해방 직후 일본제국주의의 핍박 속에서도 아키타지역 노동운동의 리더로 거듭난 바로 김일수(金一秀)다.

이우봉의 증언록에 따르면 1947년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 설립 당시에 조선인 노동자 30여명, 그리고 1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참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수의 일본인의 지지를 받아 김일수가 자유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 이때 이우봉도 서기장이 되었다.

증언록에는 김일수가 하나오카 사건을 접한 후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피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중국인들은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신뢰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오카 자유노동조합 위원장 김일수와 서기장 이우봉은 조선인 징용자 출신으로서 호흡을 같이하며 노동운동의 선봉에 서서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을 리드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김일수가 하나오카 사건 중국인 피해자 유족대표를 맡아 활약했던 만큼 중국인들도 그를 믿고 따랐던 것이다.

김 교수는 “김일수 일행이 조선인 피해자(나나쓰다테 사건) 진상규명은 물론, 하나오카 사건 중국인 피해자 유골수습과 본국 유골송환 운동을 선두에서 서서 전개하게 된 것도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우봉의 증언록에는 김일수가 망설이는 하나오카 지역 일본인 대표를 강력하게 설득하여 중국인 피해자 유골발굴과 수습에 처음으로 착수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지지 하에 중국인들과 함께 피해자 유골수습과 중국 본토로 유골송환을 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우봉의 책  '재일 1세가 증언한다'(재일 1세가 증언한다 출판사, 2002) 표지그림.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제공
이우봉의 책 '재일 1세가 증언한다'(재일 1세가 증언한다 출판사, 2002) 표지그림.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제공

김일수는 1950년 양심적 작가 마쓰다 도키코가 중국인들과 함께 조선인 및 중국인의 피해현장을 방문하고 중국 피해자 유골수습을 할 때도 이들 일행의 선두에 서서 직접 안내했다.

또한 중국인 피해자 유골송환 길에도 마쓰다 도키코와 동행했으며, 유골송환 후 일본 각지의 관련 행사와 보고집회에도 마쓰다와 함께 동석했다.

김 교수는  “해방 직후 일본 땅에서 일본제국주의 정부가 경찰을 투입하는 등 방해공작(자유당 정부가 위령집회에 철투구 경관대를 투입)을 펼치는 상황에서 피해자 지원활동에 일본지식인과 한중일 노동자가 연대한 사실이어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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