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이후 북녘의 부인과 두 아들 끝내 상봉 못하고 별세
58년간 '아내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품고 '통한의 삶' 마감
14일 광주 문빈정사에서 '민족통일장'으로 영결식 엄수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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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동안  북녘에 두고 온 부인과 두 아들을 끝내 상봉하지 못하고 통한의 삶을 마감한 통일애국열사 고 서옥렬 선생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광주전남 60여개 통일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통일애국열사 서옥렬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는 14일 12시 광주 동구 운림동 문빈정사에서 '고 서옥렬 선생 민족통일장'을 엄수했다.

100여명이 참석한 이날 영결식은 민중 의례, 연보 낭독, 조사, 호상 인산, 조가,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고인은 지난 11일 추석연휴를 앞두고 북한의 ‘아내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에 품고 92년의 생을 마감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영결식에서 김정길 상임장례위원장(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상임대표)은 조사에서 “당신의 통곡은 분단 조국의 통곡이며 당신의 분노는 냉전 시대에 사는 모든 이들의 분노였을 것”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어 김 장례위원장은 “이제 우리는 통곡을 멈추고 분노의 열정을 새로운 희망으로 바꾸려 한다”며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고인은 1927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재학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북한 인민군에 편입돼 참전했다.

휴전 후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결혼해 부인과 두 아들을 두고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1년 남파됐다가 체포돼 29년동안 장기수로 복역했다.

1990년 9월 29일 출소 이후 광주에서 생활하면서 인권통일운동의 현장에서 항상 함께 해오며 <정치경제학의 기본>, <토막일기>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1993년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북한 송환 당시에는 전향 장기수로 분류돼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 이어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 통일시민사회단체중심으로 고인의 북한 송환을 촉구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통한의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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