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후보자 게기로 '사상의 자유', '평등'의 가치를 성찰해보자

피 끓는 청춘,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지 않았던 자 누구였던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과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86세대’(80학번대와 1960년대 출생자)들은 사회변화에 온몸으로 맞섰다. 강의실보다는 최루탄 자욱한 아스팔트로 개인의 안락함보다는 민중 속으로 자신의 삶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다.

학생운동의 경우 다음 순서는 노동현장 투신이었고 시민사회단체나 농민운동 쪽으로의 이전은 ‘의지가 나약한 인텔리’ 수준으로 내몰릴 정도였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오늘날에는 이런 현상들에 도통 감이 잡히질 않겠지만 6월 항쟁과 노동계급의 엄청난 힘을 경험한지라 운동권이 사회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을 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주객관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 노동운동에도 근본적인 사회개조를 목표로 하는 크고 작은 정치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도 이에 가세해 그 한몫을 담당하게 된다.

여타 정치조직들이 다양했음에도 사노맹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애환을 노래했던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의 존재와 당시 여건에서 대중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던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내건 조직 명칭 때문이었다.

사노맹 활동을 시작한 이후 박노해의 시는 사노맹의 사상과 노선을 담아냈고 그가 쏟아내는 언어는 선진노동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노동현장의 투쟁소식과 정치정세를 담아냈던 <노동해방문학> 역시 상당한 인기를 누려 공안당국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반복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조직들은 반공주의로 인해 사회주의 대신 ‘노동해방’이란 용어로 대신했지만 사노맹은 보란 듯이 조직 명칭에 ‘사회주의’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는 ‘사회주의는 먼 미래의 일이며 탄압의 빌미가 된다’거나 ‘현장 노동자와 괴리된다’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당시 사노맹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그러나 사노맹이 남북분단과 레드컴플렉스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건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혹자는 북과 연계된 지하조직이나 반국가단체를 생각하겠지만 사노맹은 북과 어떠한 연계도 갖지 않았으며 사회당추진위나 민중정치연합이란 정치단체를 내세워 공직선거에 참여하는 등 합법 영역에서의 활동 또한 놓치지 않았다.

당시 안기부나 공안 당국은 이러한 사노맹을 ‘남로당 이후 최대의 자생적 급진좌경 반국가단체’라며 조직원들을 검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90년 초반 두세 차례 대대적인 검거와 구소련 동구권의 몰락이라는 세계정세의 급변 속에 결국 사노맹의 깃발은 꺾이고 만다.

사노맹은 노동자 계급의 주체적 활동을 표방했다. 그러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조합도 변변치 않았고 여타 노동단체나 민중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힘 또한 미약했다.

서슬퍼런 공안당국의 탄압 때문에 성장이 어려웠지만 ‘학생운동 인텔리 출신들의 급진적 운동’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기초나 목표를 담는 강령을 빚어내는 데도 실패했다.

구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사회주의 가치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낳았고 그로 인해 수 많은 활동가들이 떨어져 나갔다. 사노맹 조직원들도 이런 영향들로 인해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져갔고 대다수는 소시민이나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있다.

또 일부는 당시 타도와 고립의 대상이었던 제도권 정당에 이름 석자를 올리기도 하고 유명세를 타신 분들이 있어서 잊을만하면 가끔 씩 사노맹이 언론지상에 등장한다.

그 의도는 대부분이 제도권 정치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득을 보려는 보수정당의 계략에 의해서일 뿐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사노맹을 찾거나 들춰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극소수가 사노맹의 한계를 반성하며 이론적 성찰을 시도한 적은 있지만 재건이나 복원을 내세운 운동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노맹은 겨우 5~6년 매우 짧은 기간 존속했을 뿐이다. 어떤 운동이든 조직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숱한 변화를 거친다. 더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며 심지어 스스로가 간판을 내리기도 한다.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 대중의 ‘사회주의 강령’에 대한 열망과 주체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 성장한다. 이 과정에 숱한 탄압을 뛰어넘어야 하며 결국 대중적 자신감이 온 사회를 휘감아야 그 성공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사노맹과 사회주의, 누구에게는 젊은 청춘의 열정으로 누구에게는 정치적 성공의 장애물로 누구에게는 유아기 운동의 한계로 기억될 것이다.

당시 사노맹 사건 관계자들의 고문을 폭로한 한겨레.

그러나 사회주의는 사노맹을 위한 것도 아니며 사노맹이 만들어낸 창조물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거부하고 평등한 세상을 갈망하는 노동자 대중의 것일 뿐이다.

조국 교수 법무부장관 청문회로 때아니게 사노맹이 검색순위를 타기도 한다. 젊은 청춘과 함께 했던 사노맹 시절, 활동방식이나 수사투쟁 그리고 석방이후... 솔직히 불편한 감정 적지 않다.

그러나 사노맹의 공과 실을 떠나 우리 사회 ‘사상의 자유’와 ‘인간의 평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다.

한 개인의 장관 임용문제이지만 한번쯤은 이러한 가치들을 우리 사회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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